지역: 서유럽(프랑스·브리튼·저지대·독일) · 좌표: 50.607, 3.389 · 사건 22건
| 해 | 사료 | 내용 |
|---|---|---|
| 1340년 | 프루아사르 연대기 | 플랑드르 측이 스헬더 강 배에 공성 장치를 싣고 투르네를 공격 — 하루 종일 이어진 공격에 양측 부상자 다수 |
| 1340년 | 프루아사르 연대기 | 왕이 투르네 포위를 풀러 가기로 함 — 투르네를 잃으면 큰 손실이라고 봄 |
| 1340년 | 프루아사르 연대기 | 독일 기사 두 명과 프라스네 영주가 투르네 포위 진영에 와서 에노 백작에게 환대받음 |
| 1340년 | 프루아사르 연대기 | 에드워드 3세가 투르네 포위를 마치고 떠남 — 이야기는 스코틀랜드 쪽으로 돌아감 |
| 1340년 | 프루아사르 연대기 | 영국 편 제후들이 투르네를 포위, 브라반트 공·겔더 공 등 연합군 집결 |
| 1340년 | 프루아사르 연대기 | 1340년 8월 초 영국왕·헤이나우 백작·플랑드르 연합군이 투르네 포위를 시작 |
| 1340년 | 프루아사르 연대기 | 포위 중 프랑스왕 측이 투르네에 수비대를 들여 주둔시킴 |
| 1340년 | 프루아사르 연대기 | 포위 중 투르네 쪽 지라르 드 말린이 성문 밖으로 나와 출격 |
| 1340년 | 프루아사르 연대기 | 포위 중 가장 큰 공격 — 다리·성문에서 격전, 여러 명 부상 |
| 1340년 | 프루아사르 연대기 | Gand 회의에서 Tournai 포위를 정함 — 플랑드르 사람들은 이를 반기며, Tournai를 얻으면 Lille·Douai·Béthune도 뒤따라 얻을 수 있다고 봤다 |
| 1340년 | 프루아사르 연대기 | 영국 왕 쪽 군대가 투르네를 포위. 본문은 포위가 11주 계속됐다고 하며, 포위군(바깥 군)은 보급이 넉넉했다고 함 |
| 1340년 | 프루아사르 연대기 | 독일 기사 둘과 프레른 영주가 무리를 이끌고 투르네 포위 진영에 도착 — 에노 백작이 반김 |
| 1340년 | 프루아사르 연대기 | 에노 백작이 투르네 포위를 풀고 물러남 |
| 1340년 | 프루아사르 연대기 | 투르네 포위가 오래 계속됨 — 성은 공격으로 쉽게 떨어지지 않음 |
| 1340년 | 프루아사르 연대기 | 투르네 성 앞에서 두 왕 쪽이 휴전(trieuwes)을 맺고 공포. 휴전 기한은 「MCCC XLII」 3월 초까지 |
| 1340년 | 프루아사르 연대기 | 영국군이 투르네(Tournay) 포위를 풀고 철수 |
| 1340년 | 조반니 빌라니 「신연대기」 | 에드워드 3세 연합군이 토르네 포위, 프랑스 왕군이 접근했으나 충돌 없이 휴전 맺고 철수 |
| 1380년 | 프루아사르 연대기 | 투르네에서 부활절 무렵 의회를 열고 여러 지역 사람이 모임 |
| 1385년 | 프루아사르 연대기 | 12월 5일 부르고뉴 공과 공비, 네베르 부인과 그 딸이 릴 문으로 투르네에 들어감. 겐트 사람들이 들판까지 말을 탄 채 마중 나갔고 아무도 말에서 내리지 않음 |
| 1385년 | 프루아사르 연대기 | 투르네 헌장의 조항: 전쟁 중 약탈·노략은 서로 돌려주지 않는다. 많이 챙긴 쪽이 더 잃었다는 본문 해설 |
| 1477년 | 코민 「회상록」 | 올리비에가 모이 측 병력 30~40명을 이끌고 투르네 성문을 열게 해 프랑스 수비대 진입 |
| 1477년 | 코민 「회상록」 | 플랑드르 연합군이 투르네 교외를 불태우다 퇴각 — 겔더르 공 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