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생년 불명 — 생년 불명(정사에 나이 기록 없음).
사망 220년 — 사망 연도 불명. 219년 이후 손권에게서 익주목으로 임명되어 자귀에 머무르다 죽은 것으로 서술된다(유장전: 璋卒). 220년은 계산용 가정값이다. (추정)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190년 | 장안 | 봉거도위(헌제를 따라 장안에 있음) | 추정 |
| 191년 | 장안 | 봉거도위(헌제를 따라 장안에 있음) | 추정 |
| 192년 | 장안 | 봉거도위(헌제를 따라 장안에 있음) | 추정 |
| 193년 | 장안 | 봉거도위(헌제를 따라 장안에 있음) | 추정 |
| 194년 | 성도 | 익주목·진위장군 | 기록 |
| 195년 | 성도 | 익주목·진위장군 | 기록 |
| 196년 | 성도 | 익주목·진위장군 | 기록 |
| 197년 | 성도 | 익주목·진위장군 | 기록 |
| 198년 | 성도 | 익주목·진위장군 | 기록 |
| 199년 | 성도 | 익주목·진위장군 | 기록 |
| 200년 | 성도 | 익주목·진위장군 | 기록 |
| 201년 | 성도 | 익주목·진위장군 | 기록 |
| 202년 | 성도 | 익주목·진위장군 | 기록 |
| 203년 | 성도 | 익주목·진위장군 | 기록 |
| 204년 | 성도 | 익주목·진위장군 | 기록 |
| 205년 | 성도 | 익주목·진위장군 | 기록 |
| 206년 | 성도 | 익주목·진위장군 | 기록 |
| 207년 | 성도 | 익주목·진위장군 | 기록 |
| 208년 | 성도 | 익주목·진위장군 | 기록 |
| 209년 | 성도 | 익주목·진위장군 | 기록 |
| 210년 | 성도 | 익주목·진위장군 | 기록 |
| 211년 | 부성 · 다른 후보: 성도 | 익주목(부성에서 유비와 회합) | 기록 |
| 212년 | 성도 | 익주목(유비와 교전) | 추정 |
| 213년 | 성도 | 익주목(유비와 교전) | 추정 |
| 214년 | 성도 | 익주목(성도에서 항복) | 기록 |
| 215년 | 공안 | 진위장군(공안에 머묾) | 기록 |
| 216년 | 공안 | 진위장군(공안에 머묾) | 기록 |
| 217년 | 공안 | 진위장군(공안에 머묾) | 기록 |
| 218년 | 공안 | 진위장군(공안에 머묾) | 기록 |
| 219년 | 자귀 | 익주목(자귀 주둔) | 기록 |
| 220년 | 자귀 | 익주목(자귀 주둔)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84~189년 | 후한 조정 | (한 조정의 봉거도위 아들로 장안에 있음, 연대 불명) | 불명 |
| 190~193년 | 후한 조정 | 봉거도위(헌제를 따라 장안에 있음) | 추정 |
| 194~210년 | 유장·익주 | 익주목·진위장군 | 기록 |
| 211년 | 유장·익주 | 익주목(부성에서 유비와 회합) | 기록 |
| 212~213년 | 유장·익주 | 익주목(유비와 교전) | 추정 |
| 214년 | 유장·익주 | 익주목(성도에서 항복) | 기록 |
| 215~218년 | 촉한 | 진위장군(공안에 머묾) | 기록 |
| 219~220년 | 오 | 익주목(자귀 주둔) | 기록 |
유언이 죽자 조정의 허락을 얻어 익주자사·감군사자·익주목이 된다. 장로를 대하는 일로 원수가 된다.
정사 유장전: 주의 대리인 조위 등이 유장의 온화함을 탐내 유장을 익주자사로 천거했고, 조서가 감군사자·익주목을 내렸다. 장로가 순종하지 않아 유장이 장로의 어머니와 아우를 죽여 원수가 되었다.
연의: 연의 60회 — 연의 60회는 장송이 유장을 설득하는 대목에서 유장·장로의 사정을 소개한다.
출전: 三國志 卷31 「州大吏趙韙等貪璋溫仁,共上璋為益州刺史」 / 三國志 卷31 「璋殺魯母及弟,遂為讎敵」
법정을 보내 유비를 청하고 성도에서 부성에 이르러 유비와 100일 넘게 연회를 연다.
정사 유장전: 장송의 건의로 법정을 유비에게 보냈다. 황권·왕루가 간했으나 유장은 받아들이지 않고 유비를 접대하게 했다. 건안 16년 유비가 부성에 이르자 유장이 보병과 기병 3만여 명으로 나가 회합하고 100여 일 연회를 열었다.
연의: 연의 60~62회 — 연의 60~62회가 장송의 서촉도와 유비 영접, 부성 회합을 극화한다.
출전: 三國志 卷31 「遣法正連好先主」 / 三國志 卷31 「先主入境如歸」
성도가 포위된 지 수십 일, 아직 정병 3만과 1년 치 곡식이 있는데도 스스로 성을 열고 항복한다. 유비는 유장을 공안에 보낸다.
정사 유장전: 건안 19년 유비가 성도를 포위한 지 수십 일, 성안에 정병 3만과 곡식이 있었다. 유장은 '3년의 싸움으로 백성이 들판에 쓰러진 것은 내 탓'이라며 성을 열고 항복했다. 유비가 남군 공안으로 옮기고 재물과 옛 진위장군 인수를 돌려줬다.
연의: 연의 65회 — 연의 65회가 마초 투항 뒤 성도 항복 장면을 극화한다.
관련: 유비, 익주를 얻다
출전: 三國志 卷31 「遂開城出降,群下莫不流涕」 / 三國志 卷31 「先主遷璋於南郡公安,盡歸其財物及故佩振威將軍印綬」
손권이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차지한 뒤 유장을 익주목으로 삼아 자귀에 둔다.
정사 유장전: 손권이 관우를 죽여 형주를 취하자 유장을 익주목으로 삼아 자귀에 머물게 했다. 유장이 죽은 뒤 남중 호족 옹개가 익군에서 반란해 오에 붙자 손권은 유장의 아들 유천을 익주자사로 삼아 교주·익주 경계에 두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31 「孫權殺關羽,取荊州,以璋為益州牧,駐秭歸」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50 | 성도에 정병 3만 명, 곡식과 비단 1년 치가 있었고 관리와 백성 모두 죽을 각오였으나 스스로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유장전). |
| 무력 | 평가 불가 | 무예 기록이 없다(유장전). |
| 지력 | 43 | 장송의 말을 따라 조조와 절연하고 유비와 손을 잡았으며, 황권·왕루의 간언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했다(유장전). 진수 평: 재능이 인걸이 못 되는데 혼란한 세상에 땅을 가졌다(璋才非人雄). |
| 정치 | 50 | 아버지 유언의 뒤를 이어 20여 년 익주를 다스렸으나 은덕이 백성에게 닿지 않았다고 스스로 말했다(유장전). |
| 매력 | 52 | '백성이 3년간 싸워 들판에 살이 흩어진 것은 나 때문'이라며 항복을 결정해 아랫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유장전). 명덕이 있는 사람으로 기록된다.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유장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