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70년경(추정) — 생년 불명(170년경 추정). 계산용 가정값이며 표시는 '추정'.
사망 234년 — 건흥 12년(234), 제갈량의 사망 소식을 듣고 병이 나 죽음(이엄전)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09년 | 성도 | 성도령 | 추정 |
| 210년 | 성도 | 성도령 | 추정 |
| 211년 | 성도 | 성도령 | 추정 |
| 212년 | 성도 | 성도령 | 추정 |
| 222년 | 백제성 | 상서령 | 기록 |
| 223년 | 백제성 | 중도호·광록훈 — 영안 주둔 | 기록 |
| 224년 | 백제성 | 중도호·광록훈 — 영안 주둔 | 기록 |
| 225년 | 백제성 | 중도호·광록훈 — 영안 주둔 | 기록 |
| 226년 | 강주 | 전장군 → 표기장군 — 강주 주둔 | 기록 |
| 227년 | 강주 | 전장군 → 표기장군 — 강주 주둔 | 기록 |
| 228년 | 강주 | 전장군 → 표기장군 — 강주 주둔 | 기록 |
| 229년 | 강주 | 전장군 → 표기장군 — 강주 주둔 | 기록 |
| 230년 | 한중 | 표기장군 — 한중에 2만 명 이끌고 감 | 기록 |
| 231년 | 강주 | 표기장군 → 면관·서인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90~207년 | 유표 | 군 직리 → 형주목 유표 아래 군현 순력 | 불명 |
| 208년 | 유표 | 자귀령(조조의 형주 점령 때 입촉) | 불명 |
| 209~212년 | 유장·익주 | 성도령 | 추정 |
| 213년 | 유장·익주 | 호군 — 면죽에서 선주와 대치 뒤 항복 | 불명 |
| 214~217년 | 촉한 | 비장군 → 건위태수·흥업장군 | 불명 |
| 218~221년 | 촉한 | 건위태수·보한장군 | 불명 |
| 222년 | 촉한 | 상서령 | 기록 |
| 223~225년 | 촉한 | 중도호·광록훈 — 영안 주둔 | 기록 |
| 226~229년 | 촉한 | 전장군 → 표기장군 — 강주 주둔 | 기록 |
| 230년 | 촉한 | 표기장군 — 한중에 2만 명 이끌고 감 | 기록 |
| 231년 | 촉한 | 표기장군 → 면관·서인 | 기록 |
| 232~234년 | 촉한 | 서인(재동군 유배) | 불명 |
호군으로 면죽에서 선주와 맞서다 군을 이끌고 항복해 비장군이 된다. 익주 평정 뒤 건위태수·흥업장군.
정사 이엄전: 건안 18년 이엄이 호군으로 면죽에서 선주를 막았으나 군을 이끌고 항복했다. 선주는 비장군에 임명했고 성도가 평정되자 건위태수·흥업장군이 되었다. 본문 건안 18년은 213년이다.
연의: 연의 64회
출전: 三國志 卷40 본 「署嚴為護軍拒先主於綿竹嚴率眾降先主先主拜嚴裨將軍」
선주가 한중에 있을 때 군 병사 5천으로 마진·고승의 반란을 평정하고, 월휴 고정의 신도현 포위를 풀어 보한장군이 된다. 건안 23년.
정사 이엄전: 건안 23년 도적 마진·고승 등이 처에서 일어나 수만이 자중현까지 이르렀다. 선주는 한중에 있었고 이엄은 군을 더 징발하지 않고 군 병사 5천으로 토벌해 마진·고승의 목을 베었다. 월휴 이솔 고정이 신도현을 포위하자 달려가 구원해 적을 깼다. 보한장군을 더하고 군은 그대로 맡았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0 본 「嚴不更發兵但率將郡士五千人討之斬秦勝等首」
선주의 병이 깊어 제갈량과 함께 후주를 보필하라는 유조를 받아 중도호로 내외 군사를 통괄하고 영안에 주둔한다.
정사 이엄전: 장무 2년 선주가 이엄을 영안궁으로 불러 상서령에 임명했다. 3년 선주가 병이 위독해지자 이엄이 제갈량과 함께 유조를 받아 소주를 보필하게 되었고, 중도호로서 내외 군사를 통괄하며 영안에 주둔했다. 건흥 원년 도향후에 봉해지고 가절·광록훈을 더했다.
연의: 연의 85회
출전: 三國志 卷40 본 「三年先主疾病嚴與諸葛亮並受遺詔輔少主以嚴為中都護統內外軍事留鎮永安」
제갈량의 한중 출군에 대비해 전장군으로서 강주로 옮겨 주둔하고, 호군 진도가 영안에 남는다. 건흥 4년.
정사 이엄전: 건흥 4년 전장군으로 옮겼다. 제갈량이 한중으로 군을 내려 하자 이엄은 뒤일을 맡아 강주로 진을 옮기고 호군 진도를 영안에 남겨 모두 이엄에게 속하게 했다. 이엄이 맹달에게 '나와 공명은 함께 부탁받았다'는 편지를 보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0 본 「四年轉為前將軍以諸葛亮欲出軍漢中嚴當知後事移屯江州留護軍陳到駐永安皆統屬嚴」
군량 운반이 이어지지 않자 제갈량을 불러 돌아오게 한 뒤 군이 거짓으로 물러난 것이라 아뢰었다가 드러나 서인이 되어 재동군으로 옮겨진다. 건흥 9년.
정사 이엄전: 9년 봄 제갈량이 기산에 군을 보냈을 때 이평(嚴)이 운반을 독려했다. 여름과 가을 사이 장마로 군량 수송이 끊기자 참군 호충·독군 성번을 보내 제갈량에게 돌아오라 하자 제갈량이 군을 물렸다. 이엄은 군이 물러난 것을 듣고 놀란 척하며 '군량이 넉넉한데 왜 돌아오시오'라 했고 후주에게도 '군이 거짓으로 물러난 것이라 적을 꾀려는 것'이라 아뢰었다. 제갈량이 전후 문서를 내놓아 사실이 드러났고 이엄은 서인으로 폐해져 재동군으로 옮겨졌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0 본 「平聞軍退乃更陽驚說軍糧饒足何以便歸欲以解己不辦之責顯亮不進之愆也」
제갈량이 죽자 다시 불려 쓰일 길이 끊겼다고 여겨 병이 나 죽는다. 건흥 12년.
정사 이엄전: 12년 이엄(이평)이 제갈량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병이 나 죽었다. 제갈량이 스스로 복직시켜 주리라 기대했으나 후임은 하지 못하리라 여겨 격분한 것이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0 본 「十二年平聞亮卒發病死平常冀亮當自補复策後人不能故以激憤也」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80 | 건위태수로서 군 병사 5천으로 자·중현의 반란군 마진·고승을 벤 뒤 월휴 고정의 포위를 풀었다(이엄전). |
| 무력 | 73 | 성도령 시절 능명이 있었고 유장 휘하에서 면죽을 지켰으나 선주에게 항복했다(이엄전). |
| 지력 | 71 | 군량 운반이 어려워지자 제갈량을 불러 돌아오게 한 뒤 군이 거짓 후퇴라 아뢰었다가 드러났다(이엄전). |
| 정치 | 74 | 건위태수 때 반란을 평정해 백성의 호적을 회복했다. 중도호로서 내외 군사를 통괄했다(이엄전). |
| 매력 | 50 | 제갈량이 '정방의 성품은 분부가 흐르는 듯하다'고 평했으나 뒤에 '안신구명(安身求名)에 힘썼다'고 탄핵했다(이엄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이엄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