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월(彭越) — 사기·한서 기준 생애·이동 경로·능력치 근거

한출생 생년 불명사망 -196년기록 연도 6해

생몰

출생 생년 불명 — 출생 연도는 기록에 없다. 창읍 사람이고 자는 중(仲)이라고만 나온다.

사망 -196년 — 자치통감: 고제 11년 3월 「夷越三族」 — 기원전 196년 3월. 팽월열전 자체는 연도를 적지 않는다.

연도별 위치

연도지명직책근거
-209년거야거야택의 어부·도적 무리추정
-208년거야젊은이 무리의 우두머리추정
-207년창읍젊은이 무리의 우두머리추정
-206년정도제왕 전영에게 장군인을 받은 장군기록
-205년외황위 상국기록
-204년창읍위 상국추정
-203년수양위 상국기록
-202년창읍양왕(정도)기록
-197년한단양왕(정도)기록
-196년낙양양왕(정도)기록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연도별 직책·소속

연도소속직책근거
-209년기타거야택의 어부·도적 무리추정
-208~-207년기타젊은이 무리의 우두머리추정
-206년제제왕 전영에게 장군인을 받은 장군기록
-205년한위 상국기록
-204년한위 상국추정
-203년한위 상국기록
-202년한양왕(정도)기록
-201~-198년한양왕(정도)불명
-197~-196년한양왕(정도)기록

나온 사건·전투

-209년 · 거야택의 어부·도적 무리

진승·항량이 봉기하자 거야택의 어부 겸 도적 무리로 있으면서 「두 용이 싸우니 기다리겠다」며 관망한다.

정사 팽월열전: 창읍 사람 팽월은 거야택에서 고기를 잡고 도적질을 했다. 진승·항량이 일어나자 젊은이들이 합류를 권했으나 팽월은 「두 용이 바야흐로 싸우니 기다리자」고 했다.

출전: 史記 卷090 「彭越者昌邑人也」 / 史記 卷090 「常漁鉅野澤中為群盜」 / 史記 卷090 「兩龍方鬬且待之」

-208년 · 젊은이 무리의 우두머리

1년여 뒤 택 안의 젊은이 백여 명이 우두머리로 청하자 기일을 어긴 자를 베어 군령을 세우고 천여 명을 거느린다.

정사 팽월열전: 젊은이들이 억지로 우두머리로 삼자 해 뜰 때 모이라 약속했고, 늦은 자 중 가장 늦은 한 사람을 베어 제단을 차리고 무리를 부리니 모두 두려워했다. 이어 땅을 공략하며 제후의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천여 명을 얻었다.

출전: 史記 卷090 「居歲餘澤閒少年相聚百餘人」 / 史記 卷090 「誅最後者一人」 / 史記 卷090 「乃行略地收諸侯散卒得千餘人」

-207년 · 젊은이 무리의 우두머리

패공이 탕에서 북쪽으로 창읍을 칠 때 돕지만 창읍은 떨어지지 않았고, 패공이 서쪽으로 가자 거야택에 남아 위나라 흩어진 병사를 거둔다.

정사 팽월열전: 패공이 탕에서 북쪽으로 창읍을 칠 때 팽월이 도왔다. 창읍이 떨어지지 않아 패공이 서쪽으로 가자 팽월은 무리를 이끌고 거야 안에 있으며 위의 흩어진 군사를 거두었다.

출전: 史記 卷090 「沛公之從碭北擊昌邑彭越助之」 / 史記 卷090 「昌邑未下沛公引兵西」 / 史記 卷090 「彭越亦將其眾居鉅野中收魏散卒」

-206년 · 제왕 전영에게 장군인을 받은 장군

항우가 제후를 봉하고 돌아간 뒤 소속 없이 1만여 명을 거느리다가, 가을에 제왕 전영이 장군인을 주자 제음을 쳐 초의 소공 각을 크게 깬다.

정사 팽월열전: 항적이 입관해 제후를 왕으로 봉하고 돌아간 뒤 팽월의 무리 1만여 명은 소속이 없었다. 한 원년 가을 제왕 전영이 항왕을 배반하며 사람을 보내 장군인을 주고 제음을 내려가 초를 치게 했다. 초가 소공 각을 보내 쳤으나 팽월이 초군을 크게 깼다.

출전: 史記 卷090 「項籍入關王諸侯還歸彭越眾萬餘人毋所屬」 / 史記 卷090 「漢元年秋齊王田榮畔項王乃使人賜彭越將軍印」 / 史記 卷090 「楚命蕭公角將兵擊越越大破楚軍」

-205년 · 위 상국

한왕이 위왕 표 등과 동쪽으로 초를 칠 때 3만여 명을 이끌고 외황에서 귀속하고, 위 상국으로 양 땅을 평정한다. 팽성 패전 뒤에는 얻은 성을 모두 잃고 황하 가에 머문다.

정사 팽월열전: 한 2년 봄 한왕이 위왕 표와 동쪽으로 초를 칠 때 팽월이 3만여 명으로 외황에서 한에 귀속했다. 한왕은 위 땅 십여 성을 거둔 공을 들어 위 상국에 임명해 병력을 마음대로 쓰게 했고 양 땅을 평정하게 했다. 한이 팽성에서 패해 서쪽으로 가자 팽월은 얻은 성을 모두 다시 잃고 홀로 군을 이끌어 황하 가에 머물렀다.

관련: 팽성 전투

출전: 史記 卷090 「漢王二年春與魏王豹及諸侯東擊楚」 / 史記 卷090 「彭越將其兵三萬餘人歸漢於外黃」 / 史記 卷090 「乃拜彭越為魏相國擅將其兵略定梁地」 / 史記 卷090 「漢王之敗彭城解而西也彭越皆復亡其所下城」

-204년 · 위 상국

유병으로 한을 도와 양 땅에서 초의 후방 군량을 끊는다. 본기에는 이 무렵 수수를 건너 하비에서 항성·설공을 크게 깼다고 적혀 있다.

정사 팽월열전: 한 3년 팽월은 늘 한을 위한 유격군으로 오가며 초를 치고 양 땅에서 그 뒤쪽 군량을 끊었다. 고조본기에는 한왕이 완에 있을 때 팽월이 수수를 건너 항성·설공과 하비에서 싸워 초군을 크게 깼다고 적혀 있다(본 항목의 하비 위치는 본기에서 온 것).

출전: 史記 卷090 「漢王三年彭越常往來為漢游兵擊楚絕其後糧於梁地」

-203년 · 위 상국

항왕과 한왕이 형양에서 맞선 겨울 동안 수양·외황 등 17성을 함락하나, 항왕이 성고를 조구에게 맡기고 동쪽으로 와 되찾자 북쪽 곡성으로 물러난다.

정사 팽월열전: 한 4년 겨울 항왕과 한왕이 형양에서 서로 버틸 때 팽월이 수양·외황 17성을 쳐 내렸다. 항왕이 조구에게 성고를 지키게 하고 동쪽으로 와서 팽월이 얻은 성읍을 모두 초에 되돌렸으며 팽월은 군을 이끌고 곡성으로 북주했다.

관련: 형양·성고 공방

출전: 史記 卷090 「漢四年冬項王與漢王相距滎陽彭越攻下睢陽外黃十七城」 / 史記 卷090 「乃使曹咎守成皋自東收彭越所下城邑皆復為楚」 / 史記 卷090 「越將其兵北走穀城」

-202년 · 양왕(정도)

가을에 항왕이 양하로 남하한 틈을 타 창읍 곁 20여 성을 다시 얻고 곡식 10여만 곡을 한왕 군량으로 댄다.

정사 팽월열전: 한 5년 가을 항왕이 남쪽 양하로 달아나자 팽월이 창읍 곁 스무 곳 남짓 성을 다시 내려 곡식 10여만 곡을 얻어 한왕에게 군량으로 댔다.

출전: 史記 卷090 「漢五年秋項王之南走陽夏」 / 史記 卷090 「彭越復下昌邑旁二十餘城得穀十餘萬斛以給漢王食」

-202년 · 양왕(정도) · 대승

고릉에서 한왕이 패한 뒤 소환을 받고도 위 땅이 안정되지 않았다며 따르지 않으나, 장량의 책에 따라 수양 이북 곡성까지를 왕으로 삼겠다는 약속을 받고 군을 이끌어 해하에서 합류한다.

정사 팽월열전: 한왕이 불러도 팽월은 위 땅이 막 평정돼 초가 두려우니 갈 수 없다고 했다. 한왕이 유후에게 묻자 유후가 수양 이북에서 곡성까지는 팽 상국을 왕으로 삼고 진 이동 바닷가까지는 제왕 신에게 주겠다고 약속하라 했다. 사자가 이를 전하자 팽월이 모든 군을 이끌고 해하에서 합류해 초를 깼다.

관련: 해하 전투

출전: 史記 卷090 「漢王敗使使召彭越并力擊楚越曰魏地初定尚畏楚未可去」 / 史記 卷090 「睢陽以北至穀城皆以王彭相國」 / 史記 卷090 「彭越乃悉引兵會垓下遂破楚」

-202년 · 양왕(정도)

항적이 죽은 봄에 양왕에 봉해져 정도에 도읍한다.

정사 팽월열전: 항적이 죽은 뒤 봄에 팽월을 세워 양왕으로 삼고 정도에 도읍하게 했다.

출전: 史記 卷090 「項籍已死春立彭越為梁王都定陶」

-197년 · 양왕(정도)

진희가 대 땅에서 반란을 일으켜 고제가 친정하며 군사를 징발하자, 병을 핑계로 장수만 한단에 보내 고제의 노여움을 산다.

정사 팽월열전: 10년 가을 진희가 대 땅에서 반란을 일으켜 고제가 몸소 가 한단에 이르러 양왕에게 군사를 징발했다. 양왕은 병을 일컫고 장수를 시켜 군을 한단으로 보냈고, 고제가 화가 나 사람을 보내 꾸짖었다. 양왕은 두려워 사죄하러 가려 했으나 장수 호첩이 반란을 권하자 듣지 않고 병을 일컬었다.

관련: 진희 반란

출전: 史記 卷090 「十年秋陳豨反代地高帝自往擊至邯鄲徵兵梁王」 / 史記 卷090 「梁王稱病使將將兵詣邯鄲」 / 史記 卷090 「高帝怒使人讓梁王」

-196년 · 양왕(정도)

태복의 고발로 잡혀 낙양에 갇혔다가 서인으로 강등돼 촉 청의로 옮겨지는 길에 여후를 만난다. 여후가 고제에게 후환을 남기지 말라고 설득해 그 가문이 멸족된다.

정사 팽월열전: 태복이 달아나 한에 양왕이 호첩과 모반한다고 고했다. 고제가 사람을 시켜 양왕을 잡아 낙양에 가두었고 유사가 반역 정황이 갖춰졌다며 법대로 논죄하라 청했다. 고제는 사면해 서인으로 삼고 촉 청의로 옮기게 했으나 정에서 장안에서 오던 여후를 만났다. 여후는 낙양으로 데려가 고제에게 죽이라 말하고 그 사인에게 다시 모반을 고하게 했으며, 정위 왕염개의 상주로 종족이 멸해지고 나라가 없어졌다. 팽월열전은 사망 연도를 적지 않으나 자치통감은 고제 11년 3월(기원전 196)에 삼족이 멸해졌다고 적는다.

관련: 팽월 주살

출전: 史記 卷090 「於是上使使掩梁王」 / 史記 卷090 「傳處蜀青衣」 / 史記 卷090 「不如遂誅之妾謹與俱來」 / 史記 卷090 「遂夷越宗族國除」 / 資治通鑑 卷012 「三月夷越三族梟越首洛陽」

같이 이름이 나오는 다른 사건·전투

-203년 · 광무 대치

정사 항우본기: 한 4년 한왕은 한신의 군을 얻어 되돌아와 성고를 되찾고 광무에 진을 쳐 오창의 곡식으로 먹었다. 항우는 동해를 평정하고 돌아와 서쪽으로 광무에서 한과 마주 보고 군을 치고 몇 달을 서로 지켰다. 이때 팽월이 양 땅에서 초의 군량을 끊어 항우가 근심했고, 항우는 높은 도마를 세워 태공을 올려놓고 「지금 서둘러 항복하지 않으면 태공을 삶겠다」고 했다. 한왕이 「나의 아버지는 곧 너의 아버지이니 삶으려거든 국물 한 잔 나눠 달라」고 하자 항우가 노했으나 항백이 말려 중지했다. 항우는 한왕에게 일대일 결투를 청했으나 한왕은 「나는 힘이 아니라 지혜로 싸우겠다」며 거절했다. 한의 기사 누번이 초의 도전자를 세 번 쏴 죽이자 항우가 직접 갑옷을 입고 나서자 누번이 눈도 못 뜨고 도망쳤다. 광무 사이에서 한왕이 항우의 죄 열 가지를 헤아리자 항우가 숨겨 둔 쇠뇌로 쏘아 한왕이 가슴을 다쳐 성고로 달아났다.

-202년 · 고릉 추격

정사 항우본기·고조본기·자치통감: 홍구 화약 뒤 동쪽으로 돌아가는 항우를 한왕이 장량·진평의 권유로 쫓아 양하 남쪽에 멈추고 한신·팽월과 기일을 정해 함께 치기로 했다. 고릉에 이르렀으나 한신과 팽월의 군이 오지 않았고 초군이 한군을 쳐 크게 깼다. 한왕은 다시 보루에 들어가 참호를 깊이 파고 지켰다. 장량이 둘에게 땅을 약속하자고 권해(진 이동~바다는 한신, 수양 이북~곡성은 팽월) 사자를 보내자 둘이 군을 이끌고 왔다. 항우본기는 이 일을 한 5년으로, 유후세가는 한 4년 가을로 적는다. 이 항목은 자치통감의 고제 5년 10월을 따랐다. 병력 수는 원문에 없다.

능력치와 근거

항목전성기 수치근거
통솔51천여 명→3만여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양 땅을 오가며 초의 후방을 흔들었으나 대군 지휘 기록은 없다(팽월열전).
무력73기일 어긴 자를 베어 군령을 세운 일, 초 소공 각 격파, 수양·외황 17성 함락 등(팽월열전).
지력71기다림·후방 교란·군량 차단 등 유격 전략을 썼고 한왕의 소환에는 위 땅을 이유로 응하지 않았다(팽월열전).
정치50위 상국으로 양 땅을 평정했으나 행정 실적 기록은 적다(팽월열전).
매력50무리가 「請仲為長」로 스스로 추대했으나 반란 때 장수 호첩 한 사람을 말리지 못한 점 등 수치는 만들어 넣은 값.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팽월의 이동 경로

한 소속 다른 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