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생년 불명 — 출생 기록 없음(패 사람, 현의 호족으로 고조가 형으로 섬겼다는 서술)
사망 몰년 불명 — 사망 연도 기록 없음 — 여태후에게 승상을 파면당하고 7년 뒤 졸(陳丞相世家: 「七年而卒」). 연도는 불명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07년 | 단수 | 남양의 현 호족(독자 세력) | 기록 |
| -206년 | 남양 | 남양의 현 호족(독자 세력) | 기록 |
| -202년 | 낙양 | 안국후 | 기록 |
| -195년 | 장안 | 안국후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209~-208년 | 기타 | 남양의 현 호족(독자 세력) | 불명 |
| -207~-206년 | 기타 | 남양의 현 호족(독자 세력) | 기록 |
| -205년 | 한 | 한에 병력을 붙임 | 불명 |
| -204년 | 한 | 한에 병력을 붙임 | 추정 |
| -203년 | 한 | 한에 병력을 붙임 | 불명 |
| -202년 | 한 | 안국후 | 기록 |
| -201~-196년 | 한 | 안국후 | 불명 |
| -195년 | 한 | 안국후 | 기록 |
남양에서 수천 무리를 모아 있다가 패공이 단수에 이르자 서릉에서 항복한다.
정사 고조본기: 패공이 단수에 이르자 고무후 새와 양후 왕릉이 서릉에서 항복했다. 진승상세가: 왕릉은 함양에 이른 패공을 따르지 않고 남양에서 수천 명을 모아 있었다.
출전: 史記 卷008 「至丹水高武侯鰓襄侯王陵降西陵」 / 史記 卷056 「陵亦自聚黨數千人居南陽不肯從沛公」
한왕이 패에서 태공·여후를 맞이하게 하려고 설구·왕흡을 보내며 왕릉 병력을 쓴다.
정사 고조본기: 9월 한왕이 설구·왕흡을 무관으로 내보내 남양의 왕릉 병력을 거점으로 삼아 패에서 태공·여후를 맞이하게 했다. 초는 이를 듣고 양하에서 막았다.
출전: 史記 卷008 「因王陵兵南陽以迎太公呂后於沛」
항우가 왕릉의 어머니를 군중에 붙잡아 두고 왕릉을 부르려 하나 어머니가 한왕을 섬기라며 자결한다.
정사 진승상세가: 한왕이 항적을 치러 돌아올 때 왕릉은 병력을 한에 붙였다. 항우가 왕릉의 어머니를 군중에 두었고 어머니는 왕릉 사자에게 한왕을 삼가 섬기라고 말한 뒤 칼에 엎드려 죽었다. 항왕은 노해 어머니를 삶았다.
출전: 史記 卷056 「及漢王之還攻項籍陵乃以兵屬漢」 / 史記 卷056 「遂伏劍而死」
낙양 남궁 잔치에서 고기와 함께 항우가 천하를 잃은 까닭을 답한다.
정사 고조본기: 고조가 낙양 남궁에서 술자리를 차려 천하를 얻은 까닭을 묻자 고기·왕릉이 「폐하는 오만해 사람을 업신여기나 항우는 어질어 사람을 아낀다」며 폐하가 성을 얻으면 공 있는 이에게 주어 천하와 이익을 같이한다고 답했다.
출전: 史記 卷008 「高起王陵對曰陛下慢而侮人項羽仁而愛人」
고조가 죽기 전에 소하 다음은 조참, 그다음은 왕릉이 가하되 조금 어리석다고 일러 진평을 보좌로 붙인다.
정사 고조본기: 여후가 소하 다음을 묻자 고조는 조참이라 했고 그다음은 「王陵可然陵少憨陳平可以助之」라 일렀다.
출전: 史記 卷008 「王陵可然陵少憨陳平可以助之」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50 | 남양에서 수천 명을 모아 있다가 한왕이 항적을 칠 때 병력을 한에 붙였다(진승상세가). |
| 무력 | 52 | 싸움 기록이 적다. 어머니가 항우에게 인질로 잡혀도 한왕을 섬기라며 자결케 했다(진승상세가). |
| 지력 | 50 | 지모보다 직언을 한다는 평(「少憨」)으로 고조가 그다음 승상감으로 꼽으면서 진평의 보좌를 붙였다(고조본기). |
| 정치 | 72 | 여태후에게 「白馬之盟」을 들어 여씨 봉왕을 반대하다 승상직을 잃었다(진승상세가·여태후본기). |
| 매력 | 69 | 「任氣好直言」하고 직언했다. 어머니는 인질로 잡혀 죽었다(진승상세가).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왕릉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