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량(張良) — 사기·한서 기준 생애·이동 경로·능력치 근거

한출생 생년 불명사망 -187년기록 연도 7해

생몰

출생 생년 불명 — 출생 연도는 기록에 없다. 「良年少,未宦事韓」(진이 한을 멸한 기원전 230년 무렵 어렸다)만 보인다.

사망 -187년 — 유후세가: 「後八年卒」 — 고제 사후(기원전 195) 8년, 곧 기원전 187년 전후. 연도는 이 문장에서 계산한 값이며 사후 시호는 문성후.

연도별 위치

연도지명직책근거
-209년하비(하비 일대 소년 무리의 우두머리)추정
-208년육구장 → 한의 신도(申徒)추정
-207년양적한의 신도 / 패공 휘하 모사추정
-206년홍문한왕 휘하 모사(성신후)기록
-205년하읍성신후·모사기록
-204년형양성신후·모사기록
-203년형양성신후·모사기록
-202년고릉성신후·모사추정
-201년육유후기록
-197년마읍유후(소부 일 겸임)추정
-196년곡우유후(소부 일 겸임)기록
-195년장안유후(소부 일 겸임)기록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연도별 직책·소속

연도소속직책근거
-209년기타(하비 일대 소년 무리의 우두머리)추정
-208년한(韓)구장 → 한의 신도(申徒)추정
-207년한(韓)한의 신도 / 패공 휘하 모사추정
-206년한한왕 휘하 모사(성신후)기록
-205~-203년한성신후·모사기록
-202년한성신후·모사추정
-201년한유후기록
-200~-198년한유후(소부 일 겸임)불명
-197년한유후(소부 일 겸임)추정
-196~-195년한유후(소부 일 겸임)기록

나온 사건·전투

-209년 · (하비 일대 소년 무리의 우두머리)

진승 등이 봉기하자 장량도 젊은이 백여 명을 모은다.

정사 유후세가: 십 년 뒤 진섭 등이 군사를 일으키자 장량도 소년 백여 명을 모았다.

출전: 史記 卷055 「陳涉等起兵良亦聚少年百餘人」

-208년 · 구장 → 한의 신도(申徒)

경구에게 가려던 길에 패공을 만나 그 휘하에 들고 구장이 된다.

정사 유후세가: 경구가 유에서 초가왕을 자칭하자 장량이 따르려다 길에서 패공을 만났고, 패공이 수천 명으로 하비 서쪽을 공략하던 중이라 그에게 속해 구장이 되었다. 장량은 태공병법으로 계책을 올렸고 패공이 받아들였다.

출전: 史記 卷055 「景駒自立為楚假王在留」 / 史記 卷055 「良欲往從之道還沛公」 / 史記 卷055 「沛公拜良為廄將」

-208년 · 구장 → 한의 신도(申徒)

설에서 항량에게 한나라 공자 성을 왕으로 세우도록 설득해 한의 신도(申徒)가 된다.

정사 유후세가: 패공이 설에 가 항량을 만났고 항량이 초 회왕을 세우자, 장량이 한의 공자 횡양군 성을 세우도록 권했다. 항량이 성을 한왕으로 세우고 장량을 한의 신도로 삼아 천여 명으로 한 땅을 공략하게 했다.

출전: 史記 卷055 「良乃說項梁曰君已立楚後」 / 史記 卷055 「項梁使良求韓成立以為韓王」 / 史記 卷055 「以良為韓申徒」

-207년 · 한의 신도 / 패공 휘하 모사

한왕 성과 영천 일대를 오가며 유병으로 싸우다가 패공의 서진에 합류해 한 땅 십여 성을 함락한다.

정사 유후세가: 한 땅 몇 성을 얻었으나 진이 다시 빼앗아 영천에서 유병으로 오갔다. 패공이 환원으로 나오자 장량이 군사를 이끌고 따라 한 십여 성을 함락하고 양웅의 군을 깼으며, 한왕 성을 양적에 남겨 지키게 한 뒤 남쪽으로 완을 치고 무관으로 들어갔다.

출전: 史記 卷055 「往來為游兵潁川」 / 史記 卷055 「良引兵從沛公下韓十餘城擊破楊熊軍」 / 史記 卷055 「沛公乃令韓王成留守陽翟與良俱南攻下宛西入武關」

-207년 · 한의 신도 / 패공 휘하 모사 · 대승

요하의 진군 앞에서 정면 공격을 말리고 위장 병력과 뇌물로 진장을 흔든 뒤, 진장이 돌아서자 그 틈을 쳐서 크게 깨뜨린다.

정사 유후세가: 패공이 2만으로 요하의 진군을 치려 하자 장량이 말리고, 산에 깃발을 늘어놓아 의병을 보이고 역이기에게 보물을 들려 진장을 꾀게 하라고 했다. 진장이 배반하려 하자 군사가 따르지 않을 것이니 그 해이한 틈을 치자고 했고, 패공이 쳐서 크게 깼으며 남전에서 다시 싸워 이기고 함양에 이르러 자영의 항복을 받았다.

관련: 함양 입성과 진 멸망

출전: 史記 卷055 「沛公欲以兵二萬人擊秦嶢下軍」 / 史記 卷055 「使人先行為五萬人具食益為張旗幟諸山上為疑兵」 / 史記 卷055 「不如因其解擊之」 / 史記 卷055 「遂北至藍田再戰秦兵竟敗」 / 史記 卷055 「秦王子嬰降沛公」

-207년 · 한의 신도 / 패공 휘하 모사

함양 궁에 머물려는 패공에게 번쾌와 함께 간해 군사를 패상으로 돌리게 한다.

정사 유후세가: 패공이 궁의 재물과 여인에 마음이 끌려 머물려 하자 번쾌가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장량이 「조걸위학」과 「충언역이」를 들어 말하자 패공이 군을 패상으로 돌렸다.

출전: 史記 卷055 「沛公入秦宮」 / 史記 卷055 「夫秦為無道故沛公得至此」 / 史記 卷055 「沛公乃還軍霸上」

-206년 · 한왕 휘하 모사(성신후)

홍문에서 항우가 패공을 치려 하자 항백을 설득해 화해를 이끈다.

정사 유후세가: 항우가 홍문 아래에서 패공을 치려 하자 항백이 밤에 장량을 찾아와 함께 떠나자 했으나, 장량이 한왕을 위해 패공을 보낸 터라 달아나면 불의라며 이 일을 패공에게 알렸다. 장량이 항백을 끌어들여 패공과 만나 혼인을 맺게 했고 항백이 항우에게 패공이 배반할 뜻이 없다고 말해 화해가 이루어졌다.

관련: 홍문 연회

출전: 史記 卷055 「項羽至鴻門下欲擊沛公」 / 史記 卷055 「臣為韓王送沛公今事有急亡去不義」 / 史記 卷055 「良乃固要項伯項伯見沛公」

-206년 · 한왕 휘하 모사(성신후)

한왕에게서 받은 금과 구슬을 항백에게 주고 한중 땅을 얻어 낸다. 포중까지 배웅한 뒤 잔도를 불태우라 권하고 한으로 돌아간다.

정사 유후세가: 한왕이 금 백 일과 구슬 두 말을 주자 장량이 항백에게 바쳤고 항백을 통해 한중 땅을 청해 얻었다. 장량은 포중까지 한왕을 전송하고 돌아가며 지나온 잔도를 불사르라고 권했고 돌아가는 길에 그렇게 했다.

출전: 史記 卷055 「漢王賜良金百鎰珠二斗」 / 史記 卷055 「漢王之國良送至襃中」 / 史記 卷055 「王何不燒絕所過棧道示天下無還心」

-206년 · 한왕 휘하 모사(성신후)

항우가 한왕 성을 봉국에 보내지 않고 함께 동쪽으로 데려가자, 한이 잔도를 불살라 돌아올 뜻이 없다고 알리고 제왕 전영의 반란 서신으로 항우의 군을 북쪽 제로 돌린다.

정사 유후세가: 장량이 항왕에게 한왕이 잔도를 태워 돌아올 마음이 없다고 말하고 제왕 전영의 반란을 알리는 글을 올리자 항왕이 서쪽을 근심하지 않고 북쪽 제를 쳤다.

출전: 史記 卷055 「良說項王曰漢王燒絕棧道無還心矣」 / 史記 卷055 「乃以齊王田榮反書告項王」 / 史記 卷055 「項王以此無西憂漢心而發兵北擊齊」

-206년 · 한왕 휘하 모사(성신후)

항왕이 한왕 성을 후로 낮춘 뒤 팽성에서 죽이자 장량이 샛길로 한왕에게 돌아온다.

정사 유후세가: 항왕이 끝내 한왕을 보내지 않고 후로 삼았다가 팽성에서 죽이자 장량은 달아나 샛길로 한왕에게 돌아갔다. 한왕은 이미 삼진을 평정해 둔 때였고 장량은 성신후가 되어 동쪽 초 공격에 따랐다.

출전: 史記 卷055 「項王竟不肯遣韓王乃以為侯又殺之彭城」 / 史記 卷055 「良亡間行歸漢王」

-205년 · 성신후·모사

팽성에서 한이 패해 하읍까지 물러나자, 구강왕 경포·팽월·한신 세 사람을 쓰라고 권한다.

정사 유후세가: 팽성에서 한이 패해 하읍에 이르렀을 때 한왕이 관동을 버리겠다며 함께 공을 세울 이를 묻자 장량이 구강왕 경포, 양 땅의 팽월, 그리고 한신을 지목했다. 한왕은 수하를 보내 경포를 설득하고 팽월과 연결하게 했으며, 뒤에 한신이 위·연·대·제·조를 평정해 초를 깨는 데 이 세 사람의 힘이 컸다.

관련: 팽성 전투

출전: 史記 卷055 「至彭城漢敗而還至下邑」 / 史記 卷055 「九江王黥布楚梟將與項王有郄」 / 史記 卷055 「漢王乃遣隨何說九江王布而使人連彭越」 / 史記 卷055 「然卒破楚者此三人力也」

-204년 · 성신후·모사

형양에서 포위된 한왕이 역이기의 육국 후손 분봉안을 따르려 하자, 여덟 가지 불가함을 들어 막는다.

정사 유후세가: 한 3년 항우가 형양에서 급히 에워싸자 역이기가 육국의 후손을 세우자고 건의했고 한왕이 인장을 새기게 했다. 장량이 앞의 젓가락을 빌려 여덟 가지 불가함을 들자 한왕이 먹다 말고 인을 녹이라고 명했다.

관련: 형양·성고 공방

출전: 史記 卷055 「項羽急圍漢王滎陽」 / 史記 卷055 「陛下誠能復立六國後世」 / 史記 卷055 「臣請藉前箸為大王籌之」 / 史記 卷055 「其不可八矣」 / 史記 卷055 「令趣銷印」

-203년 · 성신후·모사

한신이 제왕 자리를 요구해 한왕이 노하자, 한왕을 설득해 한신에게 제왕의 인을 주게 한다.

정사 유후세가: 한 4년 한신이 제를 깨고 스스로 제왕이 되려 하자 한왕이 화를 냈다. 장량이 말하니 한왕이 장량을 보내 제왕 한신에게 인을 주게 했다.

출전: 史記 卷055 「漢四年韓信破齊而欲自立為齊王漢王怒」 / 史記 卷055 「張良說漢王漢王使良授齊王信印」

-202년 · 성신후·모사

고릉에서 제후군이 오지 않자 계책을 올려 제후를 모이게 한다.

정사 유후세가: 한왕이 초를 쫓아 양하 남쪽에 이르렀으나 싸움이 불리해 고릉에 보루를 쌓았고 제후가 기일에 오지 않았다. 장량이 말하고 한왕이 그 계책을 쓰자 제후가 모두 왔다(자세한 말은 항적 사건 쪽에 있다고 본문이 밝힘). 본문은 이를 한 4년 가을로 적지만 항우본기는 한 5년으로 적는다.

관련: 고릉 추격

출전: 史記 卷055 「其秋漢王追楚至陽夏南戰不利而壁固陵諸侯期不至」 / 史記 卷055 「良說漢王漢王用其計諸侯皆至」

-202년 · 성신후·모사

관중 도읍을 권한 유경의 의견에 대해 낙양은 좁고 사면에서 적을 맞는 곳이고 관중이 금성천리의 땅이라며 거든다. 고제는 그날 서쪽으로 가 관중에 도읍한다.

정사 유후세가: 유경이 관중 도읍을 건의하자 좌우 대신은 산동 사람이라 낙양을 권했으나, 유후가 관중의 지세와 조운의 이로움을 들어 유경이 옳다고 했고 고제가 그날 수레를 몰아 서쪽 관중에 도읍했다. 본문은 이 일을 한 6년 기사 다음에 두었고, 연도는 통설을 따른 추정이다.

관련: 고릉 추격

출전: 史記 卷055 「劉敬說高帝曰都關中」 / 史記 卷055 「夫關中左殽函右隴蜀沃野千里」 / 史記 卷055 「於是高帝即日駕西都關中」

-201년 · 유후

정월 공신 봉작에서 전공이 없다는 이유로 제나라 3만 호를 받을 수 있었으나 사양하고 유후로 봉해진다.

정사 유후세가: 한 6년 정월 공신을 봉할 때 고제가 장량에게 제나라 3만 호를 고르라 했으나 장량이 유(留)에 봉해지는 것으로 족하다 하여 유후로 봉해졌다.

출전: 史記 卷055 「漢六年正月封功臣」 / 史記 卷055 「運籌策帷帳中決勝千里外子房功也」 / 史記 卷055 「乃封張良為留侯與蕭何等俱封」

-201년 · 유후

장수들이 모여 수군거리는 것이 모반 조짐임을 알리고, 가장 미워하던 옹치를 먼저 봉하게 해 논공을 서두르게 한다.

정사 유후세가: 고제가 낙양 남궁에서 복도로 장수들이 모래 위에 앉아 말하는 것을 보고 묻자 장량이 모반이라 답했고, 고제가 가장 미워하되 공이 많아 죽이지 못한 옹치를 먼저 봉해 신하들을 안심시키라 권해 옹치가 십방후가 되었다.

출전: 史記 卷055 「上在雒陽南宮從複道望見諸將往往相與坐沙中語」 / 史記 卷055 「今急先封雍齒以示羣臣」 / 史記 卷055 「封雍齒為什方侯」

-197년 · 유후(소부 일 겸임)

고제를 따라 대를 치러 가 마읍 아래에서 기이한 계책을 낸다.

정사 유후세가: 유후가 고제를 따라 대를 칠 때 마읍 아래에서 기이한 계책을 냈다고만 적고 내용은 적지 않았다. 대 공격 연도는 진희의 반란 시기(한 10년)에 맞춘 추정이다.

관련: 진희 반란

출전: 史記 卷055 「留侯從上擊代出奇計馬邑下」

-196년 · 유후(소부 일 겸임)

경포 토벌을 앞두고 병든 몸으로 곡우까지 가 고제에게 초나라 사람과 직접 겨루지 말고 태자를 장군으로 삼아 관중 병력을 감독하게 하라고 권한다.

정사 유후세가: 한 11년 경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제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갔고, 장량이 병을 무릅쓰고 곡우에서 고제를 만나 초인의 날램을 말하며 태자를 장군으로 삼아 관중 병을 감독하게 하라고 권했다. 이때 숙손통이 태부, 유후가 소부의 일을 맡았다.

관련: 영포 토벌

출전: 史記 卷055 「漢十一年黥布反上病欲使太子將往擊之」 / 史記 卷055 「留侯病自彊起至曲郵見上曰」 / 史記 卷055 「願上無與楚人爭鋒」 / 史記 卷055 「令太子為將軍監關中兵」 / 史記 卷055 「留侯行少傅事」

-196년 · 유후(소부 일 겸임)

태자를 바꾸려는 고제에 맞서 여후의 청을 받아, 상산사호를 불러 태자 곁에 두는 계책을 낸다.

정사 유후세가: 여후가 건성후 여택을 시켜 장량을 압박하자, 장량이 고제가 부르지 못한 천하의 네 노인을 모셔 태자의 빈객으로 곁에 두면 고제가 이상히 여겨 물을 것이라 했고, 여택이 사람을 보내 태자의 글과 예물로 네 사람을 맞았다. 본문은 이 일을 한 11년 경포 반란 앞에 두며 연도를 따로 적지 않았다.

출전: 史記 卷055 「上欲廢太子立戚夫人子趙王如意」 / 史記 卷055 「令太子為書卑辭安車」 / 史記 卷055 「四人至客建成侯所」

-195년 · 유후(소부 일 겸임)

고제가 연회에서 태자를 따르는 사호를 보고 태자 교체를 포기한다.

정사 유후세가: 한 12년 고제가 경포를 깨고 돌아온 뒤 병이 깊어 더욱 태자를 바꾸려 했다. 장량이 간했으나 듣지 않자 병을 이유로 일을 보지 않았고, 연회에서 태자를 따르는 동원공 등 네 사람을 본 고제가 「날개가 이미 이루어졌다」며 태자를 바꾸지 않았다.

출전: 史記 卷055 「漢十二年上從擊破布軍歸」 / 史記 卷055 「四人從太子年皆八十有餘」 / 史記 卷055 「羽翼已成難動矣」 / 史記 卷055 「竟不易太子者留侯本招此四人之力也」

-195년 · 유후(소부 일 겸임)

벼슬과 세상일을 버리고 적송자를 따르겠다며 곡기를 끊고 도인을 익히다가, 고제가 죽은 뒤 여후의 강권으로 다시 먹는다.

정사 유후세가: 장량은 이제 소원이 족하니 인간사를 버리고 적송자를 따라 놀겠다 하며 벽곡과 도인을 익혔다. 고제가 죽자 여후가 은덕을 입은 일로 억지로 먹게 했고 장량은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출전: 史記 卷055 「願棄人間事欲從赤松子游耳」 / 史記 卷055 「乃學辟穀道引輕身」 / 史記 卷055 「會高帝崩呂后德留侯乃彊食之」

같이 이름이 나오는 다른 사건·전투

-207년 · 무관 입관

정사 고조본기·통감: 패공은 장량의 계책으로 역이기·육가를 보내 진 장수를 이익으로 달래는 한편 무관을 기습해 깨고, 요관 앞 산 위에 깃발을 늘어놓는 의병을 세운 뒤 남전 남쪽과 북쪽에서 진군을 크게 깨뜨렸다. 한 원년 10월 패공의 군이 제후보다 먼저 패상에 이르렀고 진왕 자영이 목에 끈을 걸고 흰 수레, 흰 말로 지도 곁에서 항복했다. 통감은 8월 패공이 수만 명을 이끌고 무관을 쳐 도륙했다고 적는다. 진 쪽 병력 수는 원문에 없다.

-206년 · 진창 암도

정사 고조본기·회음후열전: 한 원년 4월 항우의 봉으로 한왕이 된 유방이 파·촉·한중으로 들어가며 장량의 권유로 지나온 잔도를 불태웠다(항우가 동쪽을 칠 뜻이 없다는 표시). 남정에서 병사들이 동쪽으로 돌아가고 싶어 노래하자 한신이 「항우가 공신을 왕으로 봉하고 대왕만 남정에 두었으니 좌천이다, 삼진은 격문으로 평정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사기 고조본기는 8월에 한왕이 한신의 계책으로 고도(故道)를 거쳐 돌아 나와 옹왕 장한을 습격했다고 적고(회음후열전도 8월 「舉兵東出陳倉定三秦」), 한서 고조기는 같은 일을 5월로 적는다. 장한은 진창에서 맞섰으나 옹 군이 패했고 호치에서 다시 크게 졌으며 폐구로 달아났다. 한왕은 옹 땅을 평정하고 함양까지 가서 폐구를 포위했다. 「明修棧道,暗度陳倉」라는 말은 원문에 없는 후대 표현이다.

-203년 · 광무 대치

정사 항우본기: 한 4년 한왕은 한신의 군을 얻어 되돌아와 성고를 되찾고 광무에 진을 쳐 오창의 곡식으로 먹었다. 항우는 동해를 평정하고 돌아와 서쪽으로 광무에서 한과 마주 보고 군을 치고 몇 달을 서로 지켰다. 이때 팽월이 양 땅에서 초의 군량을 끊어 항우가 근심했고, 항우는 높은 도마를 세워 태공을 올려놓고 「지금 서둘러 항복하지 않으면 태공을 삶겠다」고 했다. 한왕이 「나의 아버지는 곧 너의 아버지이니 삶으려거든 국물 한 잔 나눠 달라」고 하자 항우가 노했으나 항백이 말려 중지했다. 항우는 한왕에게 일대일 결투를 청했으나 한왕은 「나는 힘이 아니라 지혜로 싸우겠다」며 거절했다. 한의 기사 누번이 초의 도전자를 세 번 쏴 죽이자 항우가 직접 갑옷을 입고 나서자 누번이 눈도 못 뜨고 도망쳤다. 광무 사이에서 한왕이 항우의 죄 열 가지를 헤아리자 항우가 숨겨 둔 쇠뇌로 쏘아 한왕이 가슴을 다쳐 성고로 달아났다.

-203년 · 홍구 화약

정사 항우본기: 한 4년 한군은 병력이 많고 식량이 넉넉했으나 항우군은 지치고 식량이 끊겼다. 한이 육가를 보내 태공을 돌려 달라 청했으나 항우가 듣지 않았고, 다시 후공을 보내자 항우가 한과 약정을 맺어 천하를 반으로 나누어 홍구 서쪽을 한, 동쪽을 초로 삼았다. 항우는 한왕의 부모·처자를 돌려보내자 군중이 만세를 불렀다. 한왕은 후공을 평국군에 봉했다. 항우는 약조 후 군을 풀어 동쪽으로 돌아갔다. 한왕이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자 장량·진평이 「호랑이를 길러 환을 남기는 일」이라며 추격을 권했고 한왕이 따랐다.

-202년 · 해하 전투

정사 항우본기·고조본기: 한 5년 고릉에서 한신·팽월이 오지 않아 패한 한왕이 장량의 계책으로 제 땅(진 동쪽~바다)을 한신에, 수양 북쪽~곡성을 팽월에 주기로 하자 두 사람이 군을 이끌고 왔다. 한신은 제에서, 유가는 수춘에서 성보를 도륙하며 오고, 대사마 주은이 초를 배반해 구강군을 이끌고 합류해 해하에서 항우를 포위했다. 한신은 병력 30만을 직접 거느리고 공장군을 왼쪽, 비장군을 오른쪽, 황제를 뒤, 강후(주발)·시장군을 그 뒤에 두었다. 한신이 먼저 싸워 불리해 물러나자 좌우가 풀려나 초군이 불리해졌고 한신이 다시 올라타 해하에서 대파했다. 항우는 병력이 적고 양식이 다한 채 밤에 사방의 초나라 노래를 듣고 놀라 우미인과 이별의 노래를 부른 뒤 8백여 기와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관영이 5천 기로 추격했다. 한서 고조기는 12월 해하 포위로 적는다.

능력치와 근거

항목전성기 수치근거
통솔50「未嘗特將也」— 직접 군을 지휘한 일이 드물어 낮게 둔다(유후세가). 다만 한 땅을 공략할 때 천여 명을 이끌었다.
무력평가 불가박랑사 습격을 계획했으나 직접 싸운 기록이 없고 「多病」이라 적혔다(유후세가).
지력98요하의 진장 매수, 잔도 소각, 경포·팽월·한신 기용안, 육국 후손 분봉 반대 등 큰 계책이 다수 채택됐다(유후세가).
정치92관중 도읍, 옹치 봉작, 태자 보전을 이끌었으나 승상 같은 실무 관직은 맡지 않았다(유후세가).
매력81항백이 따로 찾아왔고 여후·고제가 모두 계책을 청했으며 고제가 「子房功也」라 했다(유후세가). 수치는 만들어 넣은 값.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장량의 이동 경로

한 소속 다른 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