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쾌(樊噲) — 사기·한서 기준 생애·이동 경로·능력치 근거

한출생 생년 불명사망 -189년기록 연도 12해

생몰

출생 생년 불명 — 출생 연도 기록 없음

사망 -189년 — 효혜제 6년(-189) — 죽고 시호 무후. 전문 「孝惠六年樊噲卒謚為武侯」

연도별 위치

연도지명직책근거
-209년패현패공 사인기록
-208년복양패공 휘하 장수기록
-207년개봉패공 휘하 장수기록
-206년홍문임무후·낭중→장군기록
-205년형양장군기록
-204년광무장군추정
-202년진장군기록
-201년진무양후·장군→좌승상기록
-197년양국무양후·장군→좌승상기록
-195년계(연의 도읍)무양후·상국기록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연도별 직책·소속

연도소속직책근거
-209년한패공 사인기록
-208~-207년한패공 휘하 장수기록
-206년한임무후·낭중→장군기록
-205년한장군기록
-204년한장군추정
-203~-202년한장군기록
-201~-200년한무양후·장군→좌승상기록
-199~-198년한무양후·장군→좌승상불명
-197년한무양후·장군→좌승상기록
-196~-195년한무양후·상국기록

나온 사건·전투

-209년 · 패공 사인

개백정 출신으로 고조가 풍에서 일어나 패를 치자 따르고, 패공의 사인이 된다.

정사 번역등관열전: 번쾌는 패 사람으로 개를 잡는 일을 하며 고조와 함께 숨어 지냈다. 처음 고조를 따라 풍에서 일어나 패를 쳐서 함락했고, 고조가 패공이 되자 사인이 되었다.

출전: 史記 卷095 「以屠狗為事與高祖俱隱」 / 史記 卷095 「初從高祖起豐攻下沛」 / 史記 卷095 「高祖為沛公以噲為舍人」

-208년 · 패공 휘하 장수 · 대승

복양에서 장함군을 칠 때 성에 먼저 올라 23급을 베고, 호유에서 이유의 군을 깨며 성무에서 동군 수위를 포위한다.

정사 번역등관열전: 번쾌는 늘 패공을 따라 복양에서 장함군을 쳤고 성에 먼저 올라 23급을 베어 열대부가 되었다. 호유를 함락하고 이유의 군을 깨 16급을 베었으며, 성무에서 동군 수위를 포위해 적을 물리쳤다.

출전: 史記 卷095 「攻城先登斬首二十三級賜爵列大夫」 / 史記 卷095 「下戶牖破李由軍斬首十六級」 / 史記 卷095 「從攻圍東郡守尉於成武」

-207년 · 패공 휘하 장수 · 대승

개봉 북쪽에서 조분군을 깨고 완릉·양성·완성에서 선등하며 무관을 쳐 패상에 이른다.

정사 번역등관열전: 번쾌는 개봉 북쪽에서 조분군을 깨 선등해 경(卿)의 작위를 받았다. 완릉을 쳐 선등해 현성군이라는 봉호를 받고, 양성에서 남양수 의를 깨며, 완성을 쳐 선등했고, 무관을 쳐 패상에 이르러 도위 한 명을 베고 항복한 병사 2,900명을 받았다.

출전: 史記 卷095 「擊破趙賁軍開封北」 / 史記 卷095 「賜爵封號賢成君」 / 史記 卷095 「破南陽守齮於陽城」 / 史記 卷095 「攻武關至霸上」

-206년 · 임무후·낭중→장군 · 중요

홍문 연회에서 방패를 들고 군영에 뛰어들어 항우를 꾸짖어 패공이 위기를 벗어나게 한다.

정사 번역등관열전: 항우 군영에서 항장이 칼춤을 추자 번쾌가 밖에서 소식을 듣고 철 방패를 들고 군영에 들어가 곧바로 부딪혀 들어가 장막 아래에 섰다. 항우가 술과 돼지 어깨고기를 주자 다 먹은 뒤 "신은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데 술쯤이야"라며 패공을 변호했다. 패공이 변소 가는 사이 번쾌 등 넷이 샛길로 패상으로 돌아갔다. "이날 번쾌가 뛰어들어 항우를 꾸짖지 않았다면 패공의 일이 위태로웠다"고 한다.

관련: 홍문 연회

출전: 史記 卷095 「噲直撞入立帳下」 / 史記 卷095 「賜之卮酒彘肩」 / 史記 卷095 「是日微樊噲奔入營譙讓項羽沛公事幾殆」

-206년 · 임무후·낭중→장군 · 중요

한왕에게 임무후에 봉해지고 한중에 따라갔다가 삼진을 평정하며 폐구를 물로 공략한다.

정사 번역등관열전: 항우가 패공을 한왕으로 세우자 한왕이 번쾌를 임무후에 봉하고 낭중으로 삼아 한중에 따라가게 했다. 삼진을 평정하며 진 거기병을 물리쳐 장군이 되었고, 폐구를 물로 공격하는 데 최고로 공을 세웠다.

출전: 史記 卷095 「漢王賜噲爵為列侯號臨武侯」 / 史記 卷095 「遷為郎中從入漢中」 / 史記 卷095 「從擊秦車騎壤東卻敵遷為將軍」 / 史記 卷095 「灌廢丘最」

-205년 · 장군 · 중요

외황에서 왕무·정처의 군을 깨고, 팽성 패전 뒤 형양으로 돌아와 광무를 지킨다.

정사 번역등관열전: 번쾌는 외황에서 왕무와 정처의 군을 깨고 추·노·하구·설을 쳤다. 항우가 팽성에서 한왕을 이기고 노·양 땅을 되찾았으며 번쾌는 형양으로 돌아와 평음 2천 호를 더 받고 장군으로 광무를 지켰다.

출전: 史記 卷095 「擊破王武程處軍於外黃」 / 史記 卷095 「項羽敗漢王於彭城盡復取魯梁地」 / 史記 卷095 「以將軍守廣武」

-203년 · 장군

고조를 따라 항적을 치며 양하를 함락하고 초 주장군 병졸 4천을 사로잡는다.

정사 번역등관열전: 번쾌는 고조를 따라 항적을 치며 양하를 함락하고 초의 주장군 졸병 4천 명을 사로잡았다.

출전: 史記 卷095 「從高祖擊項籍下陽夏」 / 史記 卷095 「虜楚周將軍卒四千人」

-202년 · 장군 · 대승

진에서 항적을 크게 깨고 호릉을 도륙하며, 항적이 죽은 뒤 연왕 장도를 쳐 연 땅을 평정한다.

정사 번역등관열전: 번쾌는 진에서 항적을 포위해 크게 깨고 호릉을 도륙했다. 항적이 죽고 한왕이 황제가 되자 굳게 지킨 공으로 800호를 더 받았고, 고제를 따라 반한 연왕 장도를 쳐 사로잡고 연 땅을 평정했다.

출전: 史記 卷095 「圍項籍於陳大破之」 / 史記 卷095 「從高帝攻反燕王臧荼虜荼定燕地」

-201년 · 무양후·장군→좌승상

초왕 한신이 반했다는 말에 진에 따라가 한신을 사로잡고 초를 평정하며, 부절을 쪼개 무양후에 봉해진다.

정사 번역등관열전: 초왕 한신이 반하자 번쾌는 진까지 따라가 한신을 잡고 초를 평정했다. 열후에 올려 제후들과 부절을 쪼개고, 무양을 식읍으로 받아 무양후라 불렸다.

출전: 史記 卷095 「楚王韓信反噲從至陳取信定楚」 / 史記 卷095 「食舞陽號為舞陽侯」

-200년 · 무양후·장군→좌승상

대에서 반한 한왕 신을 치며 강후 등과 곽인에서 운중까지 평정한다.

정사 번역등관열전: 번쾌는 장군으로 고조를 따라 대에서 반한 한왕 신을 쳐 곽인 이후 운중까지 강후 등과 함께 평정했고 1,500호를 더 받았다.

출전: 史記 卷095 「以將軍從高祖攻反韓王信於代」 / 史記 卷095 「自霍人以往至雲中與絳侯等共定之」

-197년 · 무양후·장군→좌승상 · 대승

진희와 만구신의 군을 양국에서 쳐 백인을 깨고 청하·상산 27현을 항복시켜 좌승상이 된다.

정사 번역등관열전: 번쾌는 진희·만구신과 양국에서 싸워 백인을 깨고 선등했으며, 청하·상산 27현을 항복시키고 동원을 도륙한 뒤 좌승상이 되었다.

출전: 史記 卷095 「因擊陳豨與曼丘臣軍戰襄國破柏人先登」 / 史記 卷095 「降定清河常山凡二十七縣」 / 史記 卷095 「遷為左丞相」

-196년 · 무양후·상국

고조가 병이 깊어 군신을 들이지 않자 문을 밀치고 들어가 간한다.

정사 번역등관열전: 경포가 반하기 전 고조가 병이 깊어 대신들을 들이지 말라 했는데 십여 일 뒤 번쾌가 문을 밀치고 들어가 "조고의 일을 보지 못하셨습니까"라고 간하니 고제가 웃으며 일어났다.

출전: 史記 卷095 「噲乃排闥直入大臣隨之」 / 史記 卷095 「且陛下獨不見趙高之事乎」

-195년 · 무양후·상국 · 중요

노관의 반란을 치러 가던 중 참소로 고제가 참수를 명했으나 진평이 번쾌를 묶어 장안에 보내고, 고제 사후 여후가 풀어 작위를 되돌린다.

정사 번역등관열전: 연왕 노관이 반하자 고제가 번쾌를 상국으로 삼아 연을 치게 했다. 번쾌가 여씨에 편든다는 참소로 고제가 진평에게 주발을 태워 번쾌를 군중에서 참수하라 했으나, 진평은 여후가 두려워 번쾌를 붙들어 장안으로 보냈고 도착했을 때 고조는 이미 죽었다. 여후가 번쾌를 풀어 작위와 식읍을 되돌렸다.

출전: 史記 卷095 「其後盧綰反高帝使噲以相國擊燕」 / 史記 卷095 「乃使陳平載絳侯代將而即軍中斬噲」 / 史記 卷095 「呂后釋噲使復爵邑」

같이 이름이 나오는 다른 사건·전투

-207년 · 무관 입관

정사 고조본기·통감: 패공은 장량의 계책으로 역이기·육가를 보내 진 장수를 이익으로 달래는 한편 무관을 기습해 깨고, 요관 앞 산 위에 깃발을 늘어놓는 의병을 세운 뒤 남전 남쪽과 북쪽에서 진군을 크게 깨뜨렸다. 한 원년 10월 패공의 군이 제후보다 먼저 패상에 이르렀고 진왕 자영이 목에 끈을 걸고 흰 수레, 흰 말로 지도 곁에서 항복했다. 통감은 8월 패공이 수만 명을 이끌고 무관을 쳐 도륙했다고 적는다. 진 쪽 병력 수는 원문에 없다.

-206년 · 진창 암도

정사 고조본기·회음후열전: 한 원년 4월 항우의 봉으로 한왕이 된 유방이 파·촉·한중으로 들어가며 장량의 권유로 지나온 잔도를 불태웠다(항우가 동쪽을 칠 뜻이 없다는 표시). 남정에서 병사들이 동쪽으로 돌아가고 싶어 노래하자 한신이 「항우가 공신을 왕으로 봉하고 대왕만 남정에 두었으니 좌천이다, 삼진은 격문으로 평정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사기 고조본기는 8월에 한왕이 한신의 계책으로 고도(故道)를 거쳐 돌아 나와 옹왕 장한을 습격했다고 적고(회음후열전도 8월 「舉兵東出陳倉定三秦」), 한서 고조기는 같은 일을 5월로 적는다. 장한은 진창에서 맞섰으나 옹 군이 패했고 호치에서 다시 크게 졌으며 폐구로 달아났다. 한왕은 옹 땅을 평정하고 함양까지 가서 폐구를 포위했다. 「明修棧道,暗度陳倉」라는 말은 원문에 없는 후대 표현이다.

-206년 · 함양 입성과 진 멸망

정사 진시황본기·고조본기: 조고가 이세를 죽이고 자영을 진왕으로 세웠으나 자영은 재궁에서 조고를 찔러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 한 원년(월 표기상 10월) 유방은 장량의 계책에 따라 역이기·육가를 보내 진 장수를 이익으로 꾀하고 무관을 습격해 깬 뒤 남전 남쪽에서 의병(疑兵)의 깃발을 늘리고 약탈을 금해 진군을 흔들어 크게 깼다. 유방은 제후보다 먼저 패상에 이르렀고 자영이 흰 말이 끄는 소거에 목에 끈을 걸고 옥새와 부절을 봉해 지도 곁에서 항복했다. 장수들이 자영을 죽이자 했으나 유방은 "항복한 사람을 죽이면 상서롭지 못하다"며 관리에게 맡기고 함양에 들어가 궁궐을 머물려다 번쾌·장량의 간언으로 보물과 창고를 봉하고 패상으로 돌아와 법삼장을 선포했다. 한 달 남짓 뒤 제후군이 이르러 항적이 자영과 진 종실을 죽이고 함양을 도륙하고 궁실을 불태웠다. 원문에 병력은 「數萬人」으로만 있어 수는 null로 둔다. 서기 환산은 자치통감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202년 · 연왕 장도 토벌

정사 고조본기·노관전: 한 5년(-202) 항우를 깬 뒤 연왕 장도가 반란을 일으켜 대 땅을 함락시켰다. 고조가 친히 나가 연왕 장도를 사로잡고 태위 노관을 연왕으로 세웠으며, 번쾌는 대를 공격했다. 노관전은 노관이 7월 임강왕 공위 토벌에서 돌아와 장도 토벌에 종군했고 장도가 항복했다고 적으며 8월 노관을 연왕으로 세웠다고 한다. 고조본기는 장도 반란을 10월에 적어 달이 갈린다.

-200년 · 평성 백등산 포위

정사 흉노열전·고조본기·유경열전: 한 7년 겨울 한왕 신이 마읍에서 흉노에 항복하고 흉노가 구주를 넘어 태원을 쳐 진양에 이르자 고조가 직접 군을 이끌고 갔다. 큰 추위로 병사의 열에 두셋이 손가락을 잃었고, 묵특이 약한 모습을 보여 유인하자 한은 보병 위주의 군을 이끌고 북으로 쫓았다. 고조가 먼저 평성에 이르러 보병이 다 오기 전에 묵특이 정병을 풀어 백등에서 고조를 7일 에워싸 안팎이 서로 구하지도 군량을 대지도 못했다. 고조가 몰래 사자를 보내 연지(알씨)에게 후하게 선물하자 연지가 묵특을 설득했고, 묵특은 왕황·조리의 군이 오지 않자 한과 내통하는 것으로 의심해 포위 한 모퉁이를 풀었다. 고조는 병사에게 활을 당긴 채 밖을 향해 그 모퉁이로 곧장 나가 대군과 합류하게 했다. 한서는 이를 「진평의 비밀 계책」으로 적는다. 이후 유경이 화친 약정을 맺었고, 유경은 먼저 흉노가 쓸 만한 군이 아니라고 말했다가 광무에 갇혔다가 풀렸다. 병력 수는 흉노열전의 원문 숫자이며 사료 비판은 하지 않았다.

-197년 · 진희 반란

정사 고조본기·진희열전: 한 10년(-197) 조 상국 진희가 변경 병력을 쥐고 빈객을 모으자 조 상국 주창이 고조에게 변이 있을 거라 아뢰었고, 고조가 진희의 빈객과 재물을 조사하자 진희가 두려워 왕황·만구신과 몰래 통했다. 한 10년 7월 태상황이 죽어 불렀으나 진희는 병을 칭했고, 9월 왕황 등과 반해 스스로 대왕이 되어 조·대를 노략했다(고조본기는 8월 반란으로 적는다). 고조는 9월 직접 가서 한단에 이르러 진희가 남쪽 장수를 막지 못했다며 무능하다 평했다. 조 땅 장수에게 천금씩 걸어 왕황·만구신을 사들이려 했고 진희의 장수들은 금으로 매수되어 많이 항복했다. 11년 겨울 한군이 진희 장수 후창과 왕황을 곡역 아래서 베고 장춘을 요성에서 깼으며 태위 주발이 태원·대를 평정했다. 12월 고조가 동원을 공격해 한 달 남짓 성은 항복하지 않았고 항복한 뒤 욕한 군사는 베었다. 한 12년(-195) 겨울 번쾌의 군이 영구에서 진희를 쫓아 베었다. 한신(회음후)도 진희와 내통했다가 이 일로 주살되었다.

-196년 · 영포 토벌

정사 경포열전·고조본기: 한 11년 팽월이 주살되자 회남왕 경포는 두려워 몰래 병력을 모았고, 중대부 분혁의 고변을 계기로 7월 반란을 일으켰다. 설공이 고조에게 경포의 상·중·하계를 말하며 하계(오와 하채를 취하고 월·장사로 물러남)를 쓸 것이라 했고, 경포는 형왕 유가를 부릉으로 쫓아 죽이고 병력을 빼앗아 회수를 건너 초를 쳤다. 초가 서·동 사이에서 3군으로 나뉘어 싸우다 한 군이 깨지자 둘이 흩어졌다. 경포는 서쪽으로 가서 12년 겨울 10월 기현 서쪽 회추에서 고조의 친정군과 마주쳤고, 고조는 용성에 보루를 쌓고 항적의 진 같은 경포의 진을 보며 싫어했다. 고조가 "왜 반란하는가" 묻자 경포는 "황제가 되고 싶을 뿐"이라 답했고 큰 싸움 끝에 경포가 패해 회수를 건너 백여 명과 강남으로 달아났다. 장사 애왕의 사자에게 속아 번양으로 갔다가 번양 사람에게 살해되었다. 병력 수는 원문에 없어 null로 둔다.

능력치와 근거

항목전성기 수치근거
통솔72장군·좌승상으로 진희·노관 정벌군을 이끌었다(번역등관열전).
무력96선등 기록이 가장 많고 홍문에서 방패를 들고 군영에 뛰어들었다.
지력평가 불가홍문에서 항우에게 도리를 들어 말했으나 계책 기록은 적다.
정치평가 불가행정 기록은 없고 군사에 한정된다.
매력60고조와 같은 마을 출신으로 처가 여후의 동생이라 가장 가까웠다(번역등관열전).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번쾌의 이동 경로

한 소속 다른 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