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232년 — 「初起時,年二十四」(진 2세 원년, -209)에서 환산한 추정. 이름은 籍, 자는 羽
사망 -202년 — 한 5년(-202) 12월 — 오강에서 자결(「乃自刎而死」). 달은 한서 고조기의 해하 포위(12월) 기사에서 추정, 사기 항우본기에는 달이 없다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09년 | 오중 | 비장(裨將) — 숙부 항량을 따라 오중에서 거병 | 기록 |
| -208년 | 팽성 | 비장·차장 — 항량 휘하에서 팽성으로 물러나 노공(魯公)·차장(次將)에 임명 | 기록 |
| -207년 | 은허(원수 남) | 상장군 — 송의를 베고 거록 구원군 총대장, 제후군 상장군 | 기록 |
| -206년 | 팽성 | 제후군 상장군→서초패왕 — 입관 뒤 18왕 분봉 | 기록 |
| -205년 | 경·삭 사이 | 서초패왕 — 제를 치다 팽성에서 한군 격파 | 기록 |
| -204년 | 형양 | 서초패왕 — 형양 포위, 범증 이탈 | 기록 |
| -203년 | 홍구 | 서초패왕 — 성고·광무 대치, 홍구 화약 | 기록 |
| -202년 | 곡성 | 서초패왕 — 고릉·해하·오강에서 패사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209년 | 초 | 비장(裨將) — 숙부 항량을 따라 오중에서 거병 | 기록 |
| -208년 | 초 | 비장·차장 — 항량 휘하에서 팽성으로 물러나 노공(魯公)·차장(次將)에 임명 | 기록 |
| -207년 | 초 | 상장군 — 송의를 베고 거록 구원군 총대장, 제후군 상장군 | 기록 |
| -206년 | 초 | 제후군 상장군→서초패왕 — 입관 뒤 18왕 분봉 | 기록 |
| -205년 | 초 | 서초패왕 — 제를 치다 팽성에서 한군 격파 | 기록 |
| -204년 | 초 | 서초패왕 — 형양 포위, 범증 이탈 | 기록 |
| -203년 | 초 | 서초패왕 — 성고·광무 대치, 홍구 화약 | 기록 |
| -202년 | 초 | 서초패왕 — 고릉·해하·오강에서 패사 | 기록 |
항량과 함께 오중에서 회계군수를 베고 거병해 정병 8천을 얻는다.
정사 항우본기: 진 2세 원년 9월 회계군수 통(通)이 항량에게 병사를 일으키라 하자, 항량이 눈짓을 하고 항적(항우)이 칼을 빼 군수의 목을 베었다. 항적은 부중에서 수십 명을 쳐 죽였고 오중 병사를 일으켜 아래 현에서 정병 8천 명을 얻었다. 항량은 회계군수, 항적은 비장이 되어 아래 현을 공략했다.
출전: 史記 卷007 「籍遂拔劍斬守頭」 / 史記 卷007 「得精兵八千人」 / 史記 卷007 「籍為裨將徇下縣」
항량의 명으로 양성을 공격해 함락한 뒤 성안 사람을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인다.
정사 항우본기: 항량이 항우를 보내 따로 양성을 치게 했으나 성이 굳게 지켜 떨어지지 않았다. 함락한 뒤 모두 구덩이에 묻고 항량에게 보고했다. 양성의 위치는 본기에 적혀 있지 않다.
출전: 史記 卷007 「項梁前使項羽別攻襄城」 / 史記 卷007 「已拔皆阬之」
유방과 함께 동아를 구원하고 복양 동쪽에서 진군을 깨뜨린 뒤 성양을 도륙한다.
정사 항우본기·진초지제월표: 항량이 유방과 항우를 보내 따로 성양을 공격해 도륙했고, 서쪽으로 복양 동쪽에서 진군을 깼다. 월표는 7월 항에 「유방과 항우가 북쪽으로 동아를 구원하고 복양에서 진군을 깨뜨렸으며 동쪽으로 성양을 도륙했다」고 적었다.
출전: 史記 卷007 「沛公及項羽別攻城陽屠之」 / 史記 卷007 「西破秦軍濮陽東」 / 史記 卷016 「沛公與項羽北救東阿破秦軍濮陽東屠城陽」
유방과 함께 서쪽으로 땅을 공략하다 옹구에서 진의 삼천군수 이유를 벤다.
정사 항우본기: 정도가 떨어지지 않자 유방과 항우는 서쪽으로 옹구까지 땅을 공략해 진군을 크게 깨고 이유를 베었다. 이어 외황을 쳤으나 외황은 함락되지 않았다. 월표는 이 일을 8월 항에 둔다.
관련: 정도 전투
출전: 史記 卷007 「西略地至雝丘大破秦軍斬李由」 / 史記 卷016 「沛公與項羽西略地斬三川守李由於雍丘」
정도에서 항량이 전사하자 두려워하며 군을 팽성 서쪽으로 물린다.
정사 항우본기·월표: 장한이 정도에서 초군을 크게 깨뜨려 항량이 죽었다. 항우와 유방은 외황을 떠나 진류를 치다 못 이기고 여신 군과 함께 동쪽으로 물러나, 여신은 팽성 동쪽, 항우는 팽성 서쪽, 유방은 탕에 주둔했다. 월표는 「항우가 두려워 팽성으로 군을 되돌렸다」고 적었다.
관련: 정도 전투
출전: 史記 卷007 「項梁死」 / 史記 卷007 「項羽軍彭城西」 / 史記 卷016 「章邯破殺項梁於定陶項羽恐還軍彭城」
초 회왕이 항우를 노공(魯公)·차장(次將)으로 삼아 송의 아래에서 조를 구원하게 한다.
정사 항우본기: 회왕이 팽성으로 와 항우와 여신의 군을 합쳐 직접 거느렸다. 송의를 상장군, 항우를 노공으로 삼아 차장, 범증을 말장으로 삼아 조를 구원하게 했다. 월표는 이 임명을 후9월(윤달) 항에 둔다.
출전: 史記 卷007 「項羽為魯公為次將范增為末將救趙」 / 史記 卷016 「懷王封項羽於魯為次將屬宋義北救趙」
안양에서 46일 머문 송의를 군막에서 베고 회왕의 허락을 얻어 상장군이 된다.
정사 항우본기: 송의가 안양에서 46일 동안 진군하지 않고 아들을 제에 보내 술자리를 벌이자, 항우가 아침 문안 때 상장군 송의의 머리를 장막 안에서 베고 「송의가 제와 모의해 초를 배반했다」고 선언했다. 장수들이 복종해 항우를 가상장군으로 세웠고, 회왕이 이를 받아들여 상장군으로 삼았다.
출전: 史記 卷007 「行至安陽留四十六日不進」 / 史記 卷007 「項羽晨朝上將軍宋義即其帳中斬宋義頭」 / 史記 卷007 「懷王因使項羽為上將軍」
황하를 건너 배를 가라앉히고 솥을 깨뜨리는 결사로 거록에서 왕리의 진군을 격파한다.
정사 항우본기: 당양군·포장군이 2만을 이끌고 먼저 건넜으나 전세가 조금만 유리했고, 항우가 전군을 이끌고 도하해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를 깨뜨리고 막사를 불사르며 3일 치 양식만 지니게 했다. 아홉 번 싸워 진의 용도(수송로)를 끊고 대파했으며 소각을 베고 왕리를 사로잡았다. 섭간은 항복하지 않고 스스로 불타 죽었다. 구원 온 제후군 10여 보루는 싸우지 못하고 구경만 했다.
관련: 거록 전투
출전: 史記 卷007 「皆沈船破釜甑燒廬舍持三日糧」 / 史記 卷007 「九戰絕其甬道大破之殺蘇角虜王離」 / 史記 卷007 「涉閒不降楚自燒殺」 / 史記 卷007 「諸侯軍救鉅鹿下者十餘壁莫敢縱兵」
장한과 원수(洹水) 남쪽 은허에서 맹약하고 장한을 옹왕으로 세운다.
정사 항우본기: 항우는 사이에 장한의 진군을 극원·장남·오수 위에서 거듭 깨뜨렸고, 장한이 항복을 청하자 군리들과 상의해 원수 남쪽 은허에서 맹약했다. 장한은 눈물을 흘리며 조고의 일을 말했고, 항우는 장한을 옹왕으로 세워 초군 안에 두고 사마흔을 상장군으로 삼아 진군 선봉을 맡겼다. 월표는 7월 항에 두고, 6월 항에 「항복 약속이 정해지기 전 항우가 허락하고 쳤다」고 적었다.
출전: 史記 卷007 「項羽乃與期洹水南殷虛上」 / 史記 卷007 「項羽乃立章邯為雍王置楚軍中」 / 史記 卷016 「項羽與章邯期殷虛章邯等已降與盟以邯為雍王」
신안에서 반심을 품은 진 항졸 20여만을 밤에 쳐 성 남쪽에 구덩이로 묻는다.
정사 항우본기: 신안에 이르러 진 항졸이 제후군 병사들의 모욕에 불만을 말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항우가 경포·포장군과 상의해, 진졸이 관중에서 따르지 않을 것을 우려해 장한·사마흔·동예만 데리고 입관하기로 하고 밤에 20여만 명을 신안성 남쪽에서 구덩이에 묻었다. 정확한 달은 본기에 없어 -206년(한 원년) 초의 추정이다.
출전: 史記 卷007 「於是楚軍夜擊阬秦卒二十餘萬人新安城南」 / 漢書 卷031 「羽將諸侯兵三十餘萬行略地至河南遂西到新安」
유방이 함곡관을 닫아 막자 크게 노해 경포 등으로 관을 격파한다.
정사 고조본기·항우본기: 함곡관에 병사가 지키고 있어 들어가지 못했고 유방이 이미 함양을 격파했다는 말을 듣고 항우가 크게 노해 당양군(경포) 등을 시켜 관을 쳤다. 고조본기는 11월 중에 관을 깼고 12월 중 희(戲)에 이르렀다고 적었다.
관련: 함곡관 입관
출전: 史記 卷007 「函谷關有兵守關不得入」 / 史記 卷007 「使當陽君等擊關項羽遂入至于戲西」 / 史記 卷008 「使黥布等攻破函谷關」
홍문에서 유방을 접견하고 연회에서 범증의 살해 권유를 따르지 않는다.
정사 항우본기: 항우는 병력 40만으로 신풍 홍문에, 유방은 10만으로 패상에 있었다. 조무상의 밀고에 크게 노했으나 항백이 밤에 장량을 찾아가 사정을 전해 유방이 이튿날 100여 기로 홍문에 와 사과했다. 연회에서 범증이 세 번 옥결을 들어 보였으나 항우는 대답하지 않았고, 항장의 검무는 항백이 막아 유방은 번쾌의 도움으로 자리를 빠져나갔다.
관련: 홍문 연회
출전: 史記 卷007 「項羽兵四十萬在新豐鴻門」 / 史記 卷007 「沛公旦日從百餘騎來見項王至鴻門謝曰」 / 史記 卷007 「范增數目項王舉所佩玉珪以示之者三項王默然不應」 / 史記 卷007 「項莊拔劍起舞項伯亦拔劍起舞常以身翼蔽沛公」
함양을 도륙해 항복한 진왕 자영을 죽이고 궁실을 불사르며 관중 도읍 건의를 물리친다.
정사 항우본기: 며칠 뒤 항우가 서쪽으로 함양을 도륙하고 항복한 진왕 자영을 죽였으며 진 궁실을 불살라 불이 석 달 동안 꺼지지 않았다. 재물과 부녀를 거두어 동쪽으로 돌아가려 했고, 관중에 도읍하라는 말에는 「부귀하고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며 거절하고 그를 조롱한 자를 삶아 죽였다. 정월 전후로 추정.
관련: 함양 입성과 진 멸망
출전: 史記 卷007 「項羽引兵西屠咸陽殺秦降王子嬰燒秦宮室火三月不滅」 / 史記 卷007 「富貴不歸故鄉如衣繡夜行誰知之者」 / 史記 卷007 「項王聞之烹說者」
회왕을 의제로 높이고 제후를 18왕으로 나누어 봉한 뒤 스스로 서초패왕이 되어 팽성에 도읍한다.
정사 항우본기: 회왕이 「약속대로 하라」고 답하자 그를 의제로 높였다. 장상들과 의논해 천하를 나누어 유방을 한왕(파·촉·한중, 도읍 남정)으로 삼고 관중을 셋으로 나누어 진의 항장 장한·사마흔·동예를 옹·새·적왕으로 세웠다. 이 밖에 위표·신양·한성·사마앙·장이·경포·오예·공오·한광·장도·전도·전안 등을 봉하고, 항우는 스스로 서초패왕이 되어 9군을 다스리며 팽성에 도읍했다. 월은 월표 2월 항(「한왕이 처음 서다」)에 맞춘 추정이다.
출전: 史記 卷007 「乃尊懷王為義帝」 / 史記 卷007 「故立沛公為漢王王巴蜀漢中都南鄭」 / 史記 卷007 「項王自立為西楚霸王王九郡都彭城」
제후들이 희하에서 흩어져 봉국으로 간 뒤 의제를 장사 침현으로 옮기게 한다.
정사 항우본기: 한 원년 4월 제후들이 희하(戲下)에서 군을 해산해 각자 봉국으로 갔다. 항우는 「옛 제왕은 땅이 사방 천 리이고 반드시 상류에 거했다」며 의제를 장사 침현으로 옮기게 하고 재촉했다. 의제의 신하들이 점차 등을 돌렸다.
출전: 史記 卷007 「漢之元年四月諸侯罷戲下各就國」 / 史記 卷007 「乃使使徙義帝長沙郴縣」
군공이 없다는 이유로 한왕(韓王) 성을 봉국에 보내지 않고 팽성에 데려와 후로 낮췄다가 죽인다.
정사 항우본기: 한왕 성은 군공이 없다 하여 항우가 봉국에 가지 못하게 하고 함께 팽성에 이르러 폐하여 후로 삼았다가 다시 죽였다. 월표는 7월 항에 「항우가 성을 베었다」고 적었다.
출전: 史記 卷007 「韓王成無軍功項王不使之國」 / 史記 卷007 「廢以為侯已又殺之」 / 史記 卷016 「項羽誅成」
형산왕·임강왕에게 몰래 명해 강 가운데서 의제를 죽이게 한다.
정사 항우본기: 항우는 의제 이주를 재촉하다 신하들이 점차 배반하자 형산·임강왕에게 몰래 영을 내려 강 가운데서 의제를 쳐 죽이게 했다. 월표는 한 2년 10월 항에 「항우가 의제를 없앴다」고 적는다. 장소는 장강 가운데로만 전하고 특정할 수 없다.
출전: 史記 卷007 「乃陰令衡山臨江王擊殺之江中」 / 史記 卷016 「項羽滅義帝」
제로 북상해 성양에서 전영을 격파하고 제의 성곽과 가옥을 불사르며 항복한 병졸을 구덩이에 묻는다.
정사 항우본기: 전영이 제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팽월과 진여가 호응하자 항우가 한 2년 겨울 북쪽 성양에 이르러 전영과 싸웠다. 전영이 져서 평원으로 달아나다 평원 사람들에게 죽었고, 항우는 북으로 제의 성곽·가옥을 불사르고 전영의 항졸을 모두 구덩이에 묻고 노약자와 부녀를 사로잡았다. 제 사람들이 모여 다시 배반했다.
출전: 史記 卷007 「漢之二年冬項羽遂北至城陽」 / 史記 卷007 「田榮不勝走至平原平原民殺之」 / 史記 卷007 「皆阬田榮降卒系虜其老弱婦女」
정예 3만으로 소·팽성에서 56만 한군을 크게 깨고 수수(睢水)에 몰아넣는다.
정사 항우본기: 한왕이 5제후의 병력 56만으로 팽성에 들어와 연회를 벌이는 사이, 항우는 정예 3만을 이끌고 노에서 호릉으로 나와 소에서 새벽에 한군을 쳐서 정오에 팽성에서 크게 깼다. 한군은 곡수·사수에서 10여만이 죽고, 다시 영벽 동쪽 수수에서 10여만이 물에 빠져 수수가 흐르지 않았다. 한왕은 서북 대풍을 틈타 수십 기로 달아났고, 항우는 한왕의 부모와 처자를 군중에 잡아 두었다.
관련: 팽성 전투
출전: 史記 卷007 「漢王部五諸侯兵凡五十六萬人東伐楚」 / 史記 卷007 「項王乃西從蕭晨擊漢軍而東至彭城日中大破漢軍」 / 史記 卷007 「漢卒十餘萬人皆入睢水睢水為之不流」
팽성 이후 한왕을 쫓아 형양 남쪽 경·삭 사이에서 한군과 싸웠으나 형양 서쪽으로는 나아가지 못한다.
정사 항우본기: 한왕이 형양에 모이자 항우는 팽성에서 일어나 승세로 쫓아 형양 남쪽 경·삭 사이에서 한과 싸웠다. 한이 초를 깼고 초는 그 때문에 형양을 지나 서쪽으로 가지 못했다. 경·삭의 정확한 자리는 본기에 없다.
출전: 史記 卷007 「與漢戰滎陽南京索閒漢敗楚」 / 史記 卷007 「楚以故不能過滎陽而西」
형양에서 한의 용도를 거듭 빼앗고 범증과 함께 급히 포위하나 화의 요청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사 항우본기: 한 3년 항우가 한의 용도(수송로)를 자주 침탈해 한왕은 식량이 모자라 화의를 청하고 형양 서쪽을 한에게 떼어 주자 했다. 항우는 들어주려 했으나 범증이 말려 형양을 급히 포위했다.
관련: 형양·성고 공방
출전: 史記 卷007 「項王數侵奪漢甬道」 / 史記 卷007 「割滎陽以西為漢」 / 史記 卷007 「項王乃與范增急圍滎陽」
진평의 반간계로 범증을 의심해 권한을 줄이자 범증이 떠나 팽성에 이르기 전에 죽는다.
정사 항우본기: 한왕이 진평의 계책으로 이간하자 항우는 사자에게 한 일을 보고받고 범증이 한과 사사로이 통한다고 의심해 점차 권한을 빼앗았다. 범증은 화를 내며 해골을 돌려 달라고 청했고, 항우가 허락했으나 범증은 팽성에 이르기 전 등에 종기가 터져 죽었다. 의심의 사실 여부는 본기가 따로 말하지 않는다.
관련: 형양·성고 공방
출전: 史記 卷007 「項王乃疑范增與漢有私稍奪之權」 / 史記 卷007 「願賜骸骨歸卒伍」 / 史記 卷007 「行未至彭城疽發背而死」
기신의 거짓 항복으로 한왕이 빠져나간 뒤 기신을 불살라 죽이고 주가를 삶아 죽이며 형양을 함락한다.
정사 항우본기: 기신이 한왕 대신 황옥거를 타고 항복을 가장하는 동안 한왕은 수십 기로 서문에서 성고로 달아났다. 항우는 기신을 불태워 죽였고, 성을 지키던 주가에게 상장군 자리를 주겠다 했으나 주가가 욕하자 삶아 죽이고 종공도 죽였다.
관련: 형양·성고 공방
출전: 史記 卷007 「項王燒殺紀信」 / 史記 卷007 「楚下滎陽城生得周苛」 / 史記 卷007 「項王怒烹周苛井殺樅公」
성고를 포위해 함락한 뒤 서쪽으로 나아가려다 공(鞏)에서 막힌다.
정사 항우본기: 한 4년 항우가 병력을 이끌고 성고를 포위했고 한왕은 등공만 데리고 북문으로 달아나 황하를 건너 수무로 갔다. 초가 성고를 함락하고 서쪽으로 가려 했으나 한이 공에서 막아 서쪽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관련: 형양·성고 공방
출전: 史記 卷007 「漢之四年項王進兵圍成皋」 / 史記 卷007 「楚遂拔成皋欲西」 / 史記 卷007 「令其不得西」
광무에서 한과 몇 달 대치하며 태공을 높은 도마에 올려 한왕을 위협하고 단독 승부를 청한다.
정사 항우본기: 항우는 동해를 평정하고 서쪽으로 돌아와 한과 함께 광무를 사이에 두고 진을 치고 수개월 대치했다. 팽월이 양 땅에서 초의 양식을 끊자 높은 도마에 태공을 올려 「지금 곧 항복하지 않으면 태공을 삶겠다」고 했으나, 한왕이 「내게도 국 한 그릇을 나누어 달라」고 답했고 항백의 만류로 죽이지 않았다. 이어 「원컨대 한왕과 단둘이 겨뤄 자웅을 결하자」고 청했으나 한왕은 「나는 지혜로 싸우지 힘으로 싸우지 않는다」고 답했다. 광무 협곡에서 서로 말을 나눌 때 매복한 쇠뇌로 한왕을 맞혔다.
관련: 광무 대치
출전: 史記 卷007 「與漢俱臨廣武而軍相守數月」 / 史記 卷007 「為高俎置太公其上」 / 史記 卷007 「願與漢王挑戰決雌雄」 / 史記 卷007 「項王伏弩射中漢王」
한신이 하북·제를 평정하자 용저를 보내 막게 하나 대패하고 용저가 전사한다.
정사 항우본기: 항우는 회음후(한신)가 하북을 평정하고 제·조를 깨뜨리고 초를 치려 한다는 소식에 용저를 보냈다. 한신이 맞서고 기장 관영이 쳐서 초군이 대파되었고 용저가 죽었다. 한신은 스스로 제왕이 되었다. 항우는 무섭(武涉)을 보내 한신을 설득했으나 한신은 듣지 않았다. 싸운 자리는 본기에 없다.
출전: 史記 卷007 「乃使龍且往擊之」 / 史記 卷007 「騎將灌嬰擊之大破楚軍殺龍且」 / 史記 卷007 「使盱台人武涉往說淮陰侯」
외황을 항복받은 뒤 성인 남자를 묻으려다 13세 소년의 간언을 받아들여 사면하고 양 땅 10여 성을 항복시킨다.
정사 항우본기: 항우가 외황이 항복하자 화가 나 15세 이상 남자를 성 동쪽에 모아 구덩이에 묻으려 했다. 외황 영 사인의 13세 아들이 「대왕이 또 묻으면 이 동쪽 양 땅 10여 성이 모두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 하자 항우가 그 말을 옳게 여겨 사면했고, 수양에 이르니 여러 성이 앞다퉈 항복했다.
출전: 史記 卷007 「外黃令舍人兒年十三往說項王」 / 史記 卷007 「項王然其言乃赦外黃當阬者」 / 史記 卷007 「東至睢陽聞之皆爭下項王」
성고를 지키던 대사마 조구가 사수에서 반쯤 건널 때 한군에게 대패해 자결하자 군을 돌려 회군한다.
정사 항우본기: 항우가 해춘후 조구에게 성고를 지키며 싸우지 말라 하고 동쪽으로 갔으나, 한이 욕설로 도발해 조구가 군을 사수에서 건너게 하다 반쯤 건넌 때 한군에게 크게 패하고 조구·사마흔(새왕)은 사수 위에서 자결했다. 수양에서 소식을 들은 항우는 군을 돌렸으나 한군은 형양 동쪽 종리매 포위를 풀고 험한 곳으로 물러났다.
관련: 사수 전투
출전: 史記 卷007 「謹守成皋則漢欲挑戰慎勿與戰」 / 史記 卷007 「士卒半渡漢擊之大破楚軍」 / 史記 卷007 「大司馬咎長史翳塞王欣皆自剄汜水上」
홍구 동서로 천하를 반분하는 화약을 맺고 한왕의 부모·처자를 돌려보낸 뒤 동쪽으로 돌아간다.
정사 항우본기: 병력은 지치고 식량이 떨어진 가운데 한이 육가를 보내 태공 송환을 청하고 후공을 보내 설득하자 항우가 한과 약속해 천하를 중분하고 홍구 서쪽은 한, 동쪽은 초로 하기로 했다. 한왕의 부모·처자를 돌려보내자 군중이 만세를 불렀고, 항우는 군을 풀어 동쪽으로 돌아갔다.
관련: 홍구 화약
출전: 史記 卷007 「割鴻溝以西者為漢鴻溝而東者為楚」 / 史記 卷007 「即歸漢王父母妻子」 / 史記 卷007 「項王已約乃引兵解而東歸」
추격해 온 한왕의 군을 고릉에서 한신·팽월이 오지 않은 틈에 크게 깨뜨린다.
정사 항우본기: 한 5년 한왕이 양하 남쪽까지 항우를 쫓아 한신·팽월과 만나기로 했으나 고릉에서 한신·팽월의 군이 오지 않았고, 초가 한군을 쳐 크게 깨뜨렸다. 한왕은 보루에 다시 들어가 참호를 깊이 팠다. 달은 본기에 없다.
관련: 고릉 추격
출전: 史記 卷007 「至固陵而信越之兵不會楚擊漢軍大破之」 / 史記 卷007 「漢王復入壁深塹而自守」
해하에 보루를 쌓고 있다가 사방의 초나라 노래를 듣고 놀라 우미인과 이별의 노래를 부른다.
정사 항우본기·한서: 한신이 제에서, 유가가 수춘에서 와 해하에 모였고 대사마 주은이 초를 배반했다. 항우는 해하에 보루를 쌓았으나 병력이 적고 식량이 떨어져 한군과 제후군에 여러 겹 포위되었다. 밤에 한군이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놀라 「한이 이미 초 땅을 다 얻었는가」라 했고, 장막에서 「力拔山兮氣蓋世」를 읊자 우가 화답했으며 좌우가 모두 울었다. 한서는 12월 해하 포위로 적는다.
관련: 해하 전투
출전: 史記 卷007 「項王軍壁垓下兵少食盡」 / 史記 卷007 「夜聞漢軍四面皆楚歌項王乃大驚曰」 / 史記 卷007 「力拔山兮氣蓋世」 / 漢書 卷031 「羽夜聞漢軍四面皆楚歌」
한밤에 8백여 기와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달아나다 동성에서 28기만 남아 세 번 돌격해 한 장수를 벤다.
정사 항우본기: 항우는 말 타고 휘하 장사 8백여 기와 밤에 포위를 뚫었고, 관영이 5천 기로 추격했다. 회수를 건널 때 따르는 기병이 100여 명, 음릉에서 길을 잃어 큰 못에 빠졌고 동성에 이르러 28기만 남았다. 한군 추격은 수천이었으며 항우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싸움의 죄가 아니다」라며 기병을 네 대로 나눠 돌격해 한 장수를 베었다. 적천후(양희)는 항우의 호통에 사람과 말이 모두 놀라 몇 리를 물러났다.
관련: 오강 자결
출전: 史記 卷007 「項王則夜起飲帳中」 / 史記 卷007 「令騎將灌嬰以五千騎追之」 / 史記 卷007 「至東城乃有二十八騎」 / 史記 卷007 「遂斬漢一將」
오강에서 강동으로 건너기를 거절하고 한군 수백을 죽인 뒤 스스로 목을 쳐 죽는다.
정사 항우본기: 오강정장이 배를 대고 강동으로 건너기를 권했으나 항우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데 건너 무엇하랴, 강동 자제 8천을 데리고 건넜다가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무슨 낯으로 보겠는가」라며 사양하고 애마 추를 정장에게 주었다. 걸어서 단병으로 싸워 한군 수백을 죽이고 10여 곳에 상처를 입었다. 옛 친구 여마동을 보고 「그대는 내 옛 친구가 아닌가」라 하며 자신의 머리에 현상이 걸린 것을 말하고 스스로 목을 쳤다. 왕예가 머리를 얻었고 병사들이 서로 짓밟아 수십 명이 죽었다.
관련: 오강 자결
출전: 史記 卷007 「天之亡我我何渡為」 / 史記 卷007 「獨籍所殺漢軍數百人」 / 史記 卷007 「乃自刎而死」 / 史記 卷007 「王翳取其頭」
노는 끝까지 항복하지 않다 항우의 머리를 보고서야 항복하고, 노공의 예로 곡성에 장사 지낸다.
정사 항우본기: 항우가 죽은 뒤 초 땅은 모두 한에 항복했으나 노만 항복하지 않았다. 한이 천하의 병력으로 노를 도륙하려 했으나 예의를 지키고 주군을 위해 절개를 지키는 것을 높이 평가해 항우의 머리를 보이자 노의 부형이 항복했다. 한왕은 노공의 예로 항우를 곡성에 장사 지내고 발상해 울고 떠났다. 항씨 일족은 한왕이 모두 죽이지 않았고 항백을 사양후에 봉했다.
출전: 史記 卷007 「獨魯不下」 / 史記 卷007 「持項王頭視魯魯父兄乃降」 / 史記 卷007 「以魯公禮葬項王穀城」
정사 항우본기·전담열전·자치통감: 진의 장함이 임제에서 제·위군을 깨고 제왕 전담을 죽인 뒤, 동아로 달아난 전영을 추격해 에워쌌다. 항량이 항보를 치다가 전영이 위급하다는 소식에 군사를 돌려 제의 전영·사마 용저의 군과 함께 동아 아래에서 장함군을 크게 깨뜨렸고 장함은 서쪽으로 달아났다. 전영은 곧 군을 이끌고 제로 돌아가 제왕 가를 쫓아냈고, 항량은 홀로 진군을 쫓아 성양을 도륙하고 복양 동쪽에서 다시 장함과 싸워 이겼다. 항량은 이후 연이은 승리로 교만해졌고 정도에서 크게 패해 죽는다. 병력 수는 원문에 없다.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97 | 거록에서 2만 선봉 뒤 전군을 도하시켜 9전 9승, 제후 10여 보루가 구경만 한 가운데 왕리를 사로잡았고 제후군의 상장군이 되었다. 팽성에서는 3만으로 56만을 깼다(항우본기). |
| 무력 | 98 | 「力能扛鼎」·「身七十餘戰所當者破」, 동성에서 28기로 한 장수를 베고, 호통 한 번에 적천후의 사람과 말이 놀라 물러났다(항우본기). |
| 지력 | 62 | 홍문에서 범증의 권유를 따르지 않았고 범증을 이간계에 잃었으며, 「天亡我非戰之罪」라 하고 끝내 책임을 돌리지 않았다는 사마천의 평(항우본기). 전략 판단 기록은 없고 전술 기록만 많다. |
| 정치 | 50 | 의제를 높였다 죽였고, 18왕 분봉에서 논공이 불공평하다는 반발(전영·진여·팽월)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신안·성양·함양에서 대량 학살과 방화를 했다(항우본기). |
| 매력 | 96 | 휘하 강동 자제 8천이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했고, 외황의 13세 소년의 말을 들어 사면했다. 다만 「妒賢嫉能」이라는 한 측 평가(고조본기)와 범증을 제대로 쓰지 못한 점이 함께 기록된다.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항우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