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민 「회상록」

코민 「회상록」: 정사 사료. 다루는 해 1464년 ~ 1477년, 사건 124건을 해 순서로 정리했습니다. 원문 라이선스와 출처 포함.

등급정사
시점내부 시점
다루는 해1464년 ~ 1477년
사건 수사건 124건 · 지도에 놓은 118건
저자Philippe de Commynes
원제Mémoires de Philippe de Commynes

지역 분포: 서유럽(프랑스·브리튼·저지대·독일) 123 · 남유럽(이탈리아·그리스·이베리아·발칸) 1

사건 목록

해장소사건원문 위치
1464년Lille프랑스 사절 모르비에가 릴 궁정 공개 접견에서 샤롤루아 백작을 질책 — 도발 전 외교 충돌Book I, ch. I
1464년Nantes브르타뉴 공 프랑수아와 샤롤루아 백작이 낭트에서 상호 원조 동맹을 맺음Book I, ch. I (조약 전문)
1464년Lille부르봉 공 장이 릴에 와서 부르고뉴 공에게 영지 안 군 모집을 청함 — 「공익(Public Good)」 전쟁의 발단Book I, ch. II
1464년Cambrai샤롤루아 백작이 캉브레 주교궁 회의에서 크로이 가문을 적으로 선언해 쫓아냄 — 군 모집의 명분Book I, ch. II
1465년Nesle샤롤루아 군이 노용 쪽으로 진군해 작은 성 넬을 포위, 며칠 만에 함락Book I, ch. II
1465년Paris샤롤루아 군이 파리 성문 앞에서 시민과 소접전 — 파리 쪽이 불리, 이어 공략 불가로 생드니로 물러남Book I, ch. II
1465년Moulins왕이 부르봉 공 영지를 쳐 여러 곳을 차지하나, 부르고뉴 원군에 막혀 전 지역 정복은 못 함Book I, ch. II
1465년Paris왕이 부르봉에서 강행군으로 파리에 들어가 샤롤루아·베리·브르타뉴 군의 합류를 막으려 함 — 본문은 싸울 뜻은 없었다고 함Book I, ch. II
1465년Montlhéry몽레리 전투: 왕의 선봉이 샤롤루아 군과 맞붙음 — 본문은 양쪽 합쳐 2,000명 이상 전사로 적음Book I, ch. III
1465년Montlhéry샤롤루아 백작이 추격 중 포위돼 목에 칼상처를 입음 — 기수 필리프 드 우니 전사Book I, ch. IV
1465년Montlhéry포위된 샤롤루아 백작을 존 카데가 말 타고 끼어들어 떼어 냄 — 적은 물러남Book I, ch. IV
1465년Corbeil-Essonnes밤이 되자 왕은 코르베유로 물러남 — 본문은 진영에 불이 난 것을 야영으로 착각했다고 함Book I, ch. III
1465년London샤를 백작이 에드워드 4세의 누이 마가렛과의 혼인을 교섭하려고 프로토노타리 윌리엄 클뤼니를 런던에 보냄 — 혼인은 실제로는 몇 해 뒤에야 성사됨1.V
1465년Étampes샤를 백작과 브르타뉴 공 프랑수아가 에스탕프에서 동맹을 갱신하고 서로 「무장 형제」로 삼음1.V
1465년Moret-sur-Loing샤를 군이 세안강에 배다리를 놓고 섬을 거쳐 강을 건너 파리 쪽으로 진군 (프랑스 쪽 기병 방어선을 밀어냄)1.VI
1465년Charenton-le-Pont샤를 군이 샤랑통 다리로 진군해 다리를 지키던 프랑 궁수(민병 궁수) 부대를 격파하고, 파리 동쪽 콩플랑 일대에 진을 침1.VI
1465년Paris샤를 군이 파리를 포위: 진영 전체가 11주 동안 머묾 (베리 공과 브르타뉴 군은 생모르, 나머지는 생드니 쪽). 파리 남쪽·동쪽에 넓게 진을 침1.VI
1465년Saint-Maur-des-Fossés교섭: 파리 시민 대표(주교 기욤 샤르티에 등)가 생모르에서 왕족 대표단과 만나 파리 입성을 요청했으나 합의되지 않음1.VIII
1465년Paris루이 11세가 2000명 이상의 기병을 이끌고 파리에 들어가 시민 설득 계획을 무산시킴1.VIII
1465년Charenton-le-Pont샤를 군과 루이 11세 군이 센강 건너 대포전: 프랑스 쪽 방어 참호 포격으로 샤를 쪽 본진이 흔들림. 샤를 쪽 두 번째 배다리 준비 중 휴전 종료1.IX
1465년Charenton-le-Pont루이 11세가 배로 건너와 샤를과 강가에서 직접 만나 교섭 — 샤를에게 솜강 도시와 생폴 백작을 프랑스 대원수로 세우겠다는 제안1.XII
1465년Paris루이 11세와 샤를 백작 사이에 콩플랑 평화조약: 솜강 연안 도시(아미앵·생캉탱 등)와 페론 등을 샤를에게 넘기는 조건(200,000크라운에 재매입 가능)1.XIII
1465년Rouen노르망디를 베리 공에게 넘긴다는 흥정 속에 루앙 성이 부르봉 공 장에게 넘어가고 도시가 따름1.XIII
1465년Amiens샤를이 조약 뒤 아미앵으로 가 솜강 연안 모든 도시에서 충성 서약(homage)을 받음 (조약 직후)1.XIV
1465년Saint-Maur-des-Fossés생모르 조약: 루이 11세와 노르망디 공(베리)·브르타뉴·칼라브리아·샤를 등 제후 연합이 평화에 합의, 36인 개혁위원회 설치1.XIV
1465년Rouen루이 11세가 노르망디의 여러 곳을 되찾음(퐁드라르슈 등). 노르망디 공(베리)은 플랑드르로 달아나려다 뒤에 브르타뉴로 돌아감1.XV
1466년Dinant부르고뉴 공 필리프(선량공)가 아들 샤를에게 지휘를 맡긴 리에주 영역 도시 디낭 공성·함락: 강습으로 점령해 불태움, 포로 약 800명 익사2.I
1466년Liège리에주 쪽이 평화를 재확인하고 돈을 물며 인질 300명을 내겠다고 약속 — 샤를은 교전 없이 철수2.I
1467년Bruges부르고뉴 공 필리프 사망(1467년 6월, 본문 괄호). 샤를이 브뤼허에서 장례를 성대히 치르고 프랑스 왕에게 부고를 알림2.I
1467년Huy리에주 사람들이 휴이(Huy)를 차지하고 공작 수비대를 쫓아냄, 약탈까지 함 — 전쟁 재개2.II
1467년Sint-Truiden부르고뉴 공 샤를이 생트롱(Saint-Tron)을 포위하자 리에주군 약 3만이 구원 와서 전투, 리에주군 대패 (본문 약 6000 전사)2.II
1467년Sint-Truiden패배 뒤 생트롱 수비대가 항복, 무장을 풀고 떠남. 샤를은 인질 중 10명을 골라 참수 (6명은 석방됐던 인질)2.II
1467년Tongeren샤를이 퉁헤런(Tongres)을 항복시킴 — 같은 조건으로 항복하며 10명을 넘김, 모두 처형됨2.II
1467년Liège리에주 내부 분열 속에 움베르쿠르 영주가 시문 4곳을 차지해 부르고뉴 기를 올림 — 도시가 샤를 쪽으로 넘어감2.III
1467년Liege부르고뉴 공 샤를이 리에주에 개선 입성 — 시민이 성벽을 허물고 해자를 메움Bk2 ch.IV
1467년Ghent헨트 시민이 필리프 공 때 빼앗긴 특권·길드 깃발 복구를 요구, 샤를이 모두 수락Bk2 ch.IV
1468년Ancenis루이 11세의 군대가 브르타뉴 쪽 작은 성 둘(Chantocé·Ancenis)을 점령 — 부르고뉴 공의 동맹 지역Bk2 ch.V
1468년Tongres리에주 시민이 툰그레에 주둔한 주교와 움벡쿠르 영주를 기습해 포로로 잡음 (왕의 사주 의혹)Bk2 ch.VII
1468년Peronne샤를 공이 리에주 소식에 격노해 페론 성문을 잠그고 루이 11세를 성 안에 붙잡아 둠Bk2 ch.VII
1468년Peronne페론 조약 체결 — 루이 11세가 샤를의 조약 조건을 수락하고 서명 (조항 35개, 리에주 문제 포함)Bk2 ch.IX (조약문)
1468년Liege공격 전날 밤, 리에주 수비대 600명이 성벽 틈으로 출격해 외곽 초소를 베고 샤를·루이 11세 숙소 쪽으로 침투 — 두 군주가 거의 죽을 뻔함Bk2 ch.XII
1468년Liege리에주 공략 — 일요일 아침 두 진영이 동시에 진입, 저항 없이 함락 후 약탈·교회 피난민 포로화Bk2 ch.XIII
1468년Liege샤를이 리에주를 불태우라 명령 — 세 곳에 불을 지르고 교회는 보존, 다리 파괴Bk2 ch.XIV
1468년Polleur프랑슈몽 원정 — 겨울, 샤를 군이 마을을 불태우고 철광 시설을 부숨, 피난민 학살·포로Bk2 ch.XIV
1469년La Rochelle루이 11세가 동생 샤를을 기옌 공으로 봉함 (브리·샹파뉴 대신, 페론 조약 약속 뒤집기) — 부르고뉴 공 반발Bk2 ch.XV
1470년Tours루이 11세가 삼부회를 투르에서 소집 — 부르고뉴 공 소환·전쟁 명분 마련Bk3 ch.I
1470년Ghent파리 고등법원 집달리가 헨트에서 샤를 공에게 파리 출석 소환장 전달 — 공은 격분해 집달리를 구금했다 풂Bk3 ch.I
1470년Hesdin샤를 공이 홀란트에서 배로 아르투아에 들어가 에스댕으로 감 — 측근 배반 조사Bk3 ch.I
1470년St. Quentin12월, 프랑스 총사령관(생폴)이 생캉탱에 들어가 주민에게 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시킴Bk3 ch.II
1470년 ~ 1471년Amiens아미앵 수비대가 왕 편으로 돌아서 왕의 수비대를 받아들임 — 샤를 공은 도시 진입 실패Bk3 ch.II
1470년Calais워릭 백작이 칼레에 들어오려 하자 부총독 웬록 경이 맞이하지 않고 대포를 쏨3.IV
1470년Alkmaar에드워드 4세가 700~800명만 싣고 도망해 프리슬란트 근처 알크마르 쪽 (원문 Alquemare) 에 닻을 내림3.V
1470년The Hague부르고뉴 측 그뤼튀즈 경이 에드워드를 영접해 헤이그까지 호송3.V
1470년London워릭 백작이 런던 탑에서 헨리 6세를 풀어 다시 왕으로 세움3.VI
1470년Calais칼레에서 부르고뉴와 영국의 동맹을 유지하기로 합의 — 에드워드 대신 헨리를 넣음3.VI
1471년Picquigny샤를 공이 솜강 위 피키니를 공략 — 수비대 궁수는 다리 완성 전에 도시를 버리고 나감, 성은 2~3일 뒤 항복Bk3 ch.III
1471년Amiens샤를 공이 아미앵 주변에 6주간 야영, 포격으로 도시를 두드림 — 왕은 보베에서 병력 집결Bk3 ch.III
1471년London에드워드 4세가 런던에 입성해 시민의 환호를 받음 (부활절 전 목요일)3.VII
1471년부활절 날 워릭 백작과 몽태규 후작이 전사하는 전투 (에드워드 승리)3.VII
1471년Amiens같은 날 부르고뉴 공이 아미앵 앞에서 전투 소식을 받음 (아미앵 포위 중)3.VII
1471년웨일스 공이 이끈 군이 에드워드에게 져 웨일스 공 전사, 서머싯 공은 다음 날 참수3.VII
1471년Arras부르고뉴 공이 군을 아라스 근처에 집결시킨 뒤 페론·루아·몽디디에 쪽으로 진군3.VIII
1471년Amiens루이 11세가 부르고뉴 공에게서 아미앵을 빼앗음4.I
1471년London(부록 ch.XX) 에드워드 4세가 헨리 6세를 런던 탑에 오래 가둔 뒤 죽임part_06.txt L1898-1903 (CH.XX 예시)
1471년Barnet(부록 ch.XX) 워릭 백작이 랭커스터 복위를 꾀하다 전투에서 패해 전사part_06.txt L1905-1912 (CH.XX 예시)
1472년Nesle부르고뉴 군이 네슬(베르망두아)을 포위해 함락, 수비병 대부분 처형3.IX
1472년La Rochelle루이 11세 군이 라로셸을 포위3.IX
1472년Le Crotoy크로투아 성 조약 — 루이 11세가 아미앵·생캉탱을 돌려주기로 하고 아라스·콩플랑·페론 조약을 재확인3.IX
1472년Roye부르고뉴 군이 루아를 포위, 다음 날 수비대가 항복하고 도시를 넘김3.X
1472년Beauvais부르고뉴 공이 보베 공략에 실패하고 포위를 풀고 철수3.X
1472년Eu부르고뉴 공이 외(Eu)를 점령하고 생발레리를 함께 취함3.X
1474년Noyon콘스타블(생폴 백작)이 루이 11세와 노이옹 근처에서 만나 왕 편으로 넘어감3.XI–3.XII
1474년Neuss부르고뉴 공이 쾰른 근처 누스(Nuz)를 포위 — 헤센 방백 등이 수비4.I
1474년 ~ 1475년Neuss샤를 공 말기의 누스(노이스) 포위 — 그 뒤 세 번 이상 연이은 패전의 시작으로 서술part_06.txt L285-287 (CH.IX)
1474년(부록 ch.XX) 카스티야 왕 엔리케 사후 딸의 왕위 계승이 막히고 이사벨이 왕위를 차지part_06.txt L2004-2015 (CH.XX 예시)
1475년루이 11세가 작은 성 트롱쿠아(Tronquoy)를 공격해 몇 시간 만에 함락4.III
1475년Montdidier몽디디에 수비대가 짐을 싣고 나가 도시를 버림 (루이 11세 측 교섭)4.III
1475년Corbie루이 11세 군이 코르비를 포위해 항복받은 뒤 마을을 약탈·소각4.III
1475년Arras아라스 시민이 수비대를 출격시켰다가 프랑스 측 부르봉 대제독 군에 패해 다수 포로·전사4.III
1475년Neuss부르고뉴 공이 누스 포위를 풀고 철수 — 황제와 평화를 맺고 누스는 교황 사절에게 넘김4.IV
1475년Calais에드워드 4세가 도버에서 배를 타 칼레에 상륙, 병력 승선·상륙에 3주 걸림4.V
1475년Calais영국 왕 에드워드가 칼레에 상륙, 부르고뉴 공이 칼레로 가서 맞이함L17–18
1475년Peronne영국 왕과 부르고뉴 공이 페론에 이르나, 공이 성문을 닫아 영국군을 냉대L31–33
1475년Compiègne (출발지)루이 11세가 시종을 전령 복장으로 변장시켜 영국군 진영에 보냄 (휴전 교섭의 시작)L168–185
1475년Amiens 근처 마을통행증 발급 뒤 양국 사절이 아미앵 근처 마을에서 휴전 회담L224–226
1475년Amiens휴전 뒤 영국군 다수가 무장한 채 아미앵 시내에 들어와 프랑스 왕의 술자리 대접을 받음L436–439
1475년Picquigny피키니 다리의 격자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두 왕이 회견, 9년 휴전 조약을 성서 위에 맹세L615–617 · L664–667
1475년Vervins베르뱅에서 루이 11세와 부르고뉴 공 샤를 사이 9년 휴전(상업 조약) 체결L1004–1009
1475년Mons (Hainault)콩스타블(생폴 백작)이 기병 15~20기만 데리고 에노 몽스로 가 총독 에메리 영주 집에 머묾L1221–1222
1475년Saint-Quentin루이 11세가 기병 700~800기로 기습해 생캉탱을 장악, 주민 일부가 맞이함L1231–1235
1475년Nancy샤를 공이 로렌 낭시를 정식으로 포위, 수비가 강하게 버팀L1292–1293
1475년Peronne샤를 공 측이 콩스타블을 페론 성문에서 부르봉 서자와 생피에르 영주에게 인도L1340–1342
1475년Paris콩스타블 생폴 백작이 파리에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 처형, 재산 몰수L1347–1353
1476년Granson샤를 공이 그랑송 요새를 포격 끝에 함락시키고, 스위스 수비 700~800명을 전원 살해L1556–1558
1476년Granson 근처 산기슭그랑송 산기슭에서 스위스군 기습에 샤를 공 본진이 패배, 진영·대포를 잃음 (첫 패전)L1575–1577
1476년Milan패전 뒤 밀라노 공이 샤를 공과 결별, 루이 11세와 옛 동맹을 다시 맺어 밀라노에서 공포L1703–1705
1476년Lyons시칠리아 왕 르네가 리옹에 와서 루이 11세와 화해, 샤를 공을 후계자로 삼는 약속은 철회L1725–1727
1476년Losanne (Savoy)모라 전투 전, 샤를 공이 로잔에 본영을 두고 병력을 다시 모음L1811–1813
1476년Morat (Murten)모라에서 스위스·독일 연합군이 샤를 공 군을 격파, 로렌 공이 막판에 합류L1876–1878
1476년Castle of Rouvre near Dijon샤를 공이 사보이아 공비를 강제로 루브르 성(디종 근처)으로 끌고 감L1927–1928
1476년Plessis-du-Parc (투르 근처)루이 11세가 여동생 사보이아 공비를 플레시-뒤-파르 성문에서 맞이하고, 우호 맹세 뒤 돌려보냄L1992–1995 · L2012–2015
1476년La Rivière (부르고뉴 입구)모라 패전 뒤 샤를 공이 라 리비에르에서 6주간 칩거하며 병력을 모으지 않음L2031–2033
1476년Nancy영국 용병장 콜핀 전사 뒤 수비대장 비에르가 항복, 낭시가 로렌 공에게 넘어감L2134–2136
1476년Nancy샤를 공이 로렌 공과 대치한 뒤 낭시를 다시 포위하기로 결정L2142–2145
1476년Nancy (샤를 공 진영)낭시 밖 샤를 공 진영에서 연락책 시프롱을 교수형, 캄포바소가 자백 청취를 막음L2195–2197 · L2213–2229
1476년Murten/Morat모라 전투 소식이 도착 — 화자와 뷔샤주가 처음 듣고 왕에게 전함, 왕이 각자 200마르크 은을 줌part_06.txt L346-348 (CH.X)
1477년St. Nicholas (낭시 근처)로렌 공이 독일 용병을 이끌고 낭시 근처 생니콜라에 진을 침, 프랑스군은 바라에 대기L2354–2355
1477년Nancy부르고뉴 공 샤를이 낭시 앞 전투에서 패해 전사 (본문: 기습 공격 후 시신 발견)part_06.txt L167-168 (CH.VIII)
1477년Tours루이 11세가 부르고뉴 공 사망 소식이 확실하지 않은 채 투르로 측근·장수를 소집part_06.txt L382-384 (CH.X)
1477년Abbeville아브빌 주민이 성문을 열어 토르시 영주를 받아들임 — 부르고뉴 측 수비대 장교 피해part_06.txt L438-440 (CH.XI)
1477년Arras도랑 전 두르랑을 거쳐 아라스에 항복을 요구 — 아라스 쪽은 아르투아가 샤를의 딸 소유라며 거절part_06.txt L449-454 (CH.XI)
1477년Saint-Quentin생캉탱 주민이 스스로 도시를 지켜 왕에게 문을 열어줌 (한·보앵 성도 함께 넘어옴)part_06.txt L578-581 (CH.XIII)
1477년Péronne페론 시가 왕에게 항복 — 빌리엄 비셰가 항복을 가져옴part_06.txt L588-591 (CH.XIII)
1477년Gent왕의 이발사 올리비에가 헨트 대면에서 비공개 전언을 고집 — 거절당하고 도망part_06.txt L763-764, L776-777 (CH.XIV)
1477년Tournai올리비에가 모이 측 병력 30~40명을 이끌고 투르네 성문을 열게 해 프랑스 수비대 진입part_06.txt L801-816 (CH.XIV)
1477년Hesdin아라스 요새 보강 후 에스당 포위 — 전 총독 데 코르드가 동행, 수비대가 굴복part_06.txt L930-933, L937-939 (CH.XV)
1477년Boulogne-sur-Mer에스당 다음 불로뉴 포위 — 약 5~6일 뒤 항복part_06.txt L937-939 (CH.XV)
1477년Arras두에에서 아라스로 구원군 출동 — 아라스 안 수비대의 출격으로 대부분 전사 또는 포로 (베르지 영주 포로)part_06.txt L957-972 (CH.XV)
1477년Arras아라스 포위 끝에 성 항복 — 조건이 지켜지지 않아 시민 처형, 뒤에 벌금 6만 크라운part_06.txt L992-1002 (CH.XV)
1477년Arras헨트 등 세 신분회 사절이 왕 진영을 찾아 휴전·회담을 요청 — 왕은 편지로 반박part_06.txt L1044-1056 (CH.XVI)
1477년Gent사절단 귀환 후 헨트 시민이 대법관 위그네와 홈베르쿠르를 밤사이 체포part_06.txt L1219-1221 (CH.XVII)
1477년Gent헨트 시민이 대법관 위그네와 홈베르쿠르를 재판 후 시장 광장에서 참수 (공주의 구명 호소 실패)part_06.txt L1282-1292 (CH.XVII)
1477년Dijon오렌지 공이 디종으로 교섭 — 디종과 부르고뉴 공국의 다른 도시들이 왕에게 복종 (아소네 등은 버팀)part_06.txt L1319-1336 (CH.XVII)
1477년Tournai플랑드르 연합군이 투르네 교외를 불태우다 퇴각 — 겔더르 공 전사part_06.txt L1374-1393 (CH.XV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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