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77년경(추정) — 생년 불명(177년경 추정, 40세 졸에서 역산). 계산용 가정값이며 표시는 '추정'.
사망 217년 — 재관 3년·향년 40세에 졸(곽준전). 연도는 본문에 없어 217년경으로 추정.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12년 | 가맹 | 중랑장 — 가맹성 수비 | 기록 |
| 213년 | 가맹 | 중랑장 — 가맹성 수비 | 기록 |
| 214년 | 가맹 | 재동태수·비장군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200~208년 | 유표 | 형 곽독의 부곡을 이어받음(유표의 명) | 불명 |
| 209~211년 | 촉한 | 중랑장(유표 사후 선주에게 귀부) | 불명 |
| 212~213년 | 촉한 | 중랑장 — 가맹성 수비 | 기록 |
| 214년 | 촉한 | 재동태수·비장군 | 기록 |
| 215~217년 | 촉한 | 재동태수·비장군 | 불명 |
선주가 가맹에서 돌아서 유장을 칠 때 가맹성을 맡아 장로의 장수 양백의 공동 수비 제안을 거절하고, 유장의 부금·향존 1만여가 1년 가까이 포위해도 수백 병으로 버틴 끝에 출격해 향존의 목을 벤다.
정사 곽준전: 선주가 가맹에서 남쪽으로 돌아와 유장을 습격할 때 곽준에게 가맹성을 지키게 했다. 장로의 장수 양백이 함께 수비하자고 꾀자 '소인의 머리는 얻을 수 있어도 성은 얻을 수 없다'고 했다. 이후 유장의 장수 부금·향존 등이 1만여 명으로 낭수를 따라 올라 1년 가까이 포위했으나 곽준은 병사가 수백에 불과한 성에서 정예를 뽑아 틈을 타 출격해 크게 깨고 향존의 목을 베었다.
연의: 연의 62회 — 연의 62회도 가맹관 공방을 다루나 곽준의 활약은 정사 곽준전에만 구체적이다.
출전: 三國志 卷41 본 「小人頭可得城不可得」
선주가 촉을 평정하자 광한군을 나누어 재동군을 세우고 곽준을 재동태수·비장군으로 삼는다. 3년 재직하다 40세에 죽자 선주가 친히 조문하고 묘에서 묵는다. 졸년은 217년경으로 추정.
정사 곽준전: 선주가 촉을 평정하고 곽준의 공을 기려 광한군을 나누어 재동군으로 하고 곽준을 재동태수·비장군으로 삼았다. 재관 3년에 마흔으로 죽어 성도에 장사했다. 선주가 몹시 애석히 여겨 제갈량에게 조서를 내리고 친히 군료를 이끌고 조문해 묘 위에 묵으니 당시 사람들이 영예롭게 여겼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1 본 「先主定蜀嘉峻之功乃分廣漢為梓潼郡以峻為梓潼太守裨將軍」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72 | 가맹성을 수백 병으로 1년 가까이 지켜 유장 측 부금·향존을 격파하고 향존의 목을 베었다(곽준전). |
| 무력 | 64 | 성중에서 정예를 선발해 틈을 보아 출격해 향존을 벴다(곽준전). |
| 지력 | 66 | 장로의 장수 양백이 함께 수비하자고 꾀자 '소인의 머리는 얻어도 성은 얻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곽준전). |
| 정치 | 61 | 재동태수로서 3년 재직했다(곽준전). |
| 매력 | 64 | 선주가 크게 애석히 여겨 친히 조문하고 묘에서 묵었다(곽준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곽준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