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생년 불명
사망 261년 — 경원 2년 졸, 사공 추증(261)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50년 | 이릉 | 형주자사 | 기록 |
| 257년 | 수춘 | 행진동장군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235~246년 | 위 | 중서시랑 | 불명 |
| 247~249년 | 위 | 안풍태수 | 불명 |
| 250년 | 위 | 형주자사 | 기록 |
| 251~254년 | 위 | 형주자사 | 불명 |
| 255~256년 | 위 | 행감군 | 불명 |
| 257년 | 위 | 행진동장군 | 기록 |
| 258~260년 | 위 | 행진동장군 | 불명 |
| 261년 | 위 | 정남장군 | 불명 |
명제가 궁실을 크게 수리해 백성이 지치자 「물은 배를 띄우고 또 엎는다」며 상소한다.
정사 왕기전: 17세에 군에서 불렀으나 뜻에 맞지 않아 낭야로 가 유학했다. 황초 중 효렴에 천거되어 낭중이 되고 청주자사 왕릉이 별가로 청해 수수했다. 사마의가 불러 중서시랑이 되었는데 명제가 궁실을 크게 수리해 백성이 피곤해하자 「물이 배를 띄우나 엎기도 한다」는 비유를 들어 부역을 줄이라고 상소했다. 연도는 청룡·경초 연간으로 추정.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7 「臣聞古人以水喻民」
오와 접한 안풍에서 방비를 밝게 두고 청엄하게 다스려 적이 감히 범하지 못한다. 오가 건업에 대군을 모아 양주를 칠 듯 소리쳤을 때 제갈탄이 묻자 손권이 늙고 후사가 없어 끝내 출병하지 못하리라 판단해 맞았다.
정사 왕기전: 조상이 청하여 종사중랑으로, 이어 안풍태수가 되었다. 군이 오와 접해 있어 정치가 청엄하고 위엄과 은혜가 있었으며 방비를 분명히 하니 적이 감히 범하지 못했다. 오가 건업에 대군을 모아 양주를 치겠다고 소리치자 자사 제갈탄이 왕기에게 헤아리게 했는데, 왕기는 육손 등이 죽고 손권이 늙고 안에 어진 후사가 없으며 새 장수는 미덥지 않으니 지지 세력을 보충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했고 오는 끝내 출병하지 못했다. 연도는 조상 집정기(정시 연간)로 추정.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7 「郡接吳寇,爲政清嚴有威惠,明設防備,敵不敢犯」
왕창을 따라 오를 칠 때 보협을 이릉에서 압박하며 실은 병을 나누어 웅부 창고를 쳐 쌀 30여만 곡을 얻고 항복민 수천을 받는다.
정사 왕기전: 조상이 처형된 해(249) 상서로 있다가 형주자사로 나가 양렬장군이 되었고 정남 왕창을 따라 오를 쳤다. 왕기가 이릉에서 보협을 따로 습격하자 보협은 문을 닫고 지켰고, 왕기는 공격하는 모양을 보이며 실제로는 병을 나누어 웅부 창고를 빼앗아 쌀 30여만 곡을 거두고 안북장군 담정을 포로로 하고 항복민 수천을 받았다. 그 항민을 옮겨 이릉현을 세웠다. 연도는 왕창의 오 공략(250).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7 「基別襲步恊於夷陵」
관구검·문흠이 반란하자 사마사에게 「토붕와해한다」며 속진을 권하고 남돈을 먼저 점거해 관구검을 항으로 되돌려 보내고 군을 압박해 이긴다.
정사 왕기전: 관구검·문흠이 반란하자 왕기가 행감군·가절로 허창군을 통솔하다 허창에서 사마경왕과 만났다. 「회남의 반란은 관민이 난을 바란 것이 아니라 관구검 등이 속이고 협박한 것이니 대군이 다가가면 토붕와해한다」며 앞장서기를 청했고, 모두가 관구검·문흠이 날래다며 맞서기를 꺼릴 때 왕기는 남돈에 큰 창고가 있어 군인 40일 식량이 되니 먼저 점거하는 것이 요체라고 거듭 청했다. 허락을 받아 영수에 이르러 다시 말했고 마침내 제멋대로 진군해 남돈을 점거했다. 관구검이 항에서 다투어 가려다 왕기가 먼저 도착한 것을 알고 돌아가 항을 지켰으며 문흠이 등애를 습격하러 간 사이 형세가 갈라지자 왕기가 항을 압박해 관구검의 무리가 패했다. 연도는 정원 2년(255).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7 「遂輙進據南頓」
감로 2년 제갈탄이 반란하자 조서가 군을 거두고 보루를 굳히라 했으나 더 이상 북산으로 옮겨 가라는 명도 「산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이 병 다스림의 요체」라며 상소해 지키고, 성 동쪽·남쪽 26군을 감독해 수춘을 함락한다.
정사 왕기전: 제갈탄이 반란하자 왕기가 본관으로 행진동장군·도독양주제군사가 되었다. 오가 주이를 보내 구원하며 안성에 진을 치자 조서로 북산으로 군을 옮기라 했으나 왕기는 「지금 포위한 보루가 견고하고 병마도 모여들고 있어 수비를 정비해 도망자를 기다려야 한다. 험지로 옮기면 인심이 흔들린다」며 편의대로 상소해 허락받았다. 사마문왕이 구두에 주둔하며 부서를 나누자 왕기는 성 동쪽·남쪽 26군을 감독해 성중 식량이 떨어져 밤낮으로 보루를 공격할 때마다 막아 깼다. 사마소가 「그대는 깊이 이해를 헤아려 홀로 뜻을 굳게 지켜 조서를 어기고 중의를 거역해 끝내 적을 사로잡았다」고 편지했다. 이어 수춘 함락 뒤 경병을 깊이 보내 오 당자 자제들을 맞이하자는 제안에 대승 뒤 경적이 되는 일이니 하지 말자고 간해 중지시켰다.
연의: 연의 112회 — 연의 112회에 같은 인물·사건이 나온다.
출전: 三國志 卷27 「基督城東城南二十六軍」
경원 2년 양양태수가 오의 등유가 귀순을 청한다고 하자 속임수로 의심해 뜻을 다투고, 같은 해 졸해 사공을 추증받는다.
정사 왕기전: 경원 2년 양양태수가 오의 등유 등이 귀화하려 한다고 표를 올리자 왕기가 조서를 받아 이를 계기로 강동을 뒤흔들려 했으나 속임수를 의심해 「요즘은 사직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지 군을 움직여 외부의 이익을 구할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고 사마소가 그대로 따랐다. 등유는 끝내 투항하지 않았다. 이해 왕기가 죽어 사공을 추증받고 시호는 경후, 아들 왕휘가 이었으나 일찍 죽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7 「追贈司空,謚曰景侯」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76 | 감로 2년 수춘 포위에서 성 동쪽과 남쪽 26군을 거느려 밤낮의 공격을 막아 깼다(왕기전). |
| 무력 | 56 | 무력 기록은 뚜렷하지 않다. |
| 지력 | 81 | 정원 2년 문흠·관구검 난 때 남돈을 먼저 점거하자고 설득했고 옳았다(왕기전). |
| 정치 | 70 | 이릉에서 보협을 압박하며 실은 병을 나누어 웅부 창고에서 쌀 30만 곡을 거두고 항복민 수천을 받았다(왕기전). |
| 매력 | 61 | 명제의 궁실 조영에 백성이 지쳤다며 상소했고 오가 건업에서 크게 군을 모아도 양주 침공은 못 한다고 정확히 판단했다(왕기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왕기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