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劉禪) — 정사 삼국지 기준 생애·이동 경로·능력치 근거

촉한출생 207년사망 271년기록 연도 5해

생몰

출생 207년 — 배송지 주: 「初即帝位年十七」(223)에서 건안 12년(207)생으로 계산(후주전 주)

사망 271년 — 태시 7년(271) 낙양에서 사망(후주전)

연도별 위치

연도지명직책근거
223년성도촉한 황제기록
224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25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26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27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28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29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30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31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32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33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34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35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36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37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38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39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40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41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42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43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44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45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46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47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48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49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50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51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52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53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54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55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56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57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58년성도촉한 황제기록
259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60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61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62년성도촉한 황제추정
263년성도촉한 황제기록
264년낙양안락공(위의 번보)기록
265년낙양안락공(위의 번보)추정
266년낙양안락공(진)추정
267년낙양안락공(진)추정
268년낙양안락공(진)추정
269년낙양안락공(진)추정
270년낙양안락공(진)추정
271년낙양안락공(진)기록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연도별 직책·소속

연도소속직책근거
207~218년촉한(유비의 아들, 직위 없음)불명
219~222년촉한한중왕 왕태자→황태자불명
223년촉한촉한 황제기록
224~257년촉한촉한 황제추정
258년촉한촉한 황제기록
259~262년촉한촉한 황제추정
263년촉한촉한 황제기록
264년위안락공(위의 번보)기록
265년위안락공(위의 번보)추정
266~270년진(晉)안락공(진)추정
271년진(晉)안락공(진)기록

나온 사건·전투

219년 · 한중왕 왕태자→황태자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왕태자로 세워진다.

정사 후주전: 건안 24년(219) 선주가 한중왕이 되고 유선을 왕태자로 세웠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33 본 「先主為漢中王立為王太子」

223년 · 촉한 황제 · 즉위

유비가 영안궁에서 죽자 성도에서 17세로 제위를 이어받는다.

정사 후주전: 장무 3년 여름 4월 선주가 영안궁에서 죽고, 5월 후주가 성도에서 즉위했다. 나이는 17세, 이 해는 위 황초 4년이다.

연의: 연의 85회 — 연의 85회는 백제성에서 유비가 제갈량에게 후사를 맡기는 장면을 길게 적는다.

출전: 三國志 卷33 본 「五月後主襲位於成都時年十七」

258년 · 촉한 황제

경요 원년 환관 황호가 정사를 맡기 시작한다.

정사 후주전: 경요 원년 강유가 성도로 돌아왔고 사관이 경성이 나타났다고 하여 대사하고 연호를 고쳤다. 환관 황호가 이때부터 정사를 마음대로 하기 시작했다. 경요 원년은 258년.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33 본 「宦人黃皓始專政」

263년 · 촉한 황제 · 멸망

등애가 면죽에서 제갈첨을 깨뜨리자 초주의 계책에 따라 성북에서 관을 끌고 스스로 묶고 항복한다.

정사 후주전: 염흥 원년(263) 겨울 등애가 면죽에서 제갈첨을 깼다. 후주가 광록대부 초주의 계책으로 등애에게 항복 문서를 보냈고, 등애가 성북에 이르자 후주가 관을 싣고 스스로 묶은 채 군영 문에 이르렀다. 등애가 묶음을 풀고 관을 태웠다.

연의: 연의 118회 — 연의 118회는 북지왕 유심이 항복에 반대해 처자를 죽이고 자결하는 장면을 길게 적는다.

출전: 三國志 卷33 본 「艾至城北後主興櫬自縛詣軍壘門艾解縛焚櫬延請相見」

264년 · 안락공(위의 번보)

온 가족과 함께 낙양으로 옮겨 가 이듬해 안락현공에 봉해진다.

정사 후주전: 후주가 온 가족과 동쪽으로 옮겨 낙양에 이르렀고 경원 5년(264) 3월 정해일 책명으로 안락현공이 되었다. 식읍 1만 호, 비단 1만 필 등을 받았고 자손 50여 명이 후가 되었다.

연의: 연의 119회 — 연의 119회는 사마소가 연회에서 촉 음악을 보이자 "즐거워 촉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답한 이야기를 적는다.

출전: 三國志 卷33 본 「後主舉家東遷既至洛陽策命之曰」

271년 · 안락공(진)

태시 7년 낙양에서 죽는다.

정사 후주전: 안락공 유선은 태시 7년(271) 낙양에서 죽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33 본 「薨於洛陽」

같이 이름이 나오는 다른 사건·전투

208년 · 장판 전투

정사 선주전: 유표가 죽고 유종이 항복했으나 유비는 형주 백성을 이끌고 남으로 내려갔다. 당양에 이르렀을 때 무리가 10여만, 치중이 수천 량이었고 하루 십여 리를 갔다. 조조가 양양에서 유비가 지나간 것을 알고 정기 5천으로 하루 밤낮에 300여 리를 달려 당양 장판에서 따라잡았다. 유비는 처자를 버리고 제갈량·장비·조운 등 수십 기와 달아났다. 장비는 20기로 후미를 맡아 물가 다리를 끊고 맞섰고, 조운은 어린 아들(후주)을 안고 감부인을 지켜 낸다.

연의: 연의 41~42회

능력치와 근거

항목전성기 수치근거
통솔평가 불가제갈량 사후 장완·비의 등에 맡겼고 직접 군을 이끈 기록이 없다(후주전).
무력평가 불가무용 기록 없음(후주전).
지력50평에서 "현명한 재상을 쓰면 이치를 따르는 군주이나 환관에 홀리면 어두운 군주"라 했다(후주전 평).
정치50사면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나 제갈량이 죽은 뒤 제도가 느슨해졌다고 평했다(후주전 평).
매력50위에 항복한 뒤 안락공에 봉해졌고 자손 50여 명이 후가 되었다(후주전).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유선의 이동 경로

촉한 소속 다른 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