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60년경(추정) — 생년 불명(160년경, 계산용 가정값·표시는 '추정')
사망 223년 — 황초 4년(223) 사망(형옹전)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07년 | 유성 | 기주종사·광종장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84~198년 | 기타·재야 | (하간 막 출신, 관직 사양·우북평에서 전주와 교유) | 불명 |
| 199~205년 | 기타·재야 | 우북평에서 5년 지냄 | 불명 |
| 206년 | 위 | 기주종사·광종장 | 불명 |
| 207년 | 위 | 기주종사·광종장 | 기록 |
| 208년 | 위 | 기주종사·광종장 | 불명 |
| 209~212년 | 위 | 사공연속→행당령→승상문하독 | 불명 |
| 213~217년 | 위 | 좌풍익→평원후 조식 가승→참승상군사→동조연→태자소부 | 불명 |
| 218~222년 | 위 | 태부→시중·상서복야·사례교위·태상 | 불명 |
| 223년 | 위 | 태상(사망) | 불명 |
조조가 유성을 칠 때 전주를 통해 조조에게 나아가 향도가 되겠다고 청한다.
정사 형옹전: 우북평에서 전주와 5년 지낸 뒤 조조가 기주를 평정하자 형옹이 "조공의 법령이 엄하고 백성은 난을 싫어한다"며 먼저 귀향했다. 전주가 "형옹은 백성의 선각"이라 했고 형옹은 조조를 만나 유성을 치는 향도가 되기를 청했다. 유성 정벌은 207년.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2 본 「乃見太祖求爲鄉导以克柳城」
평원후 조식의 가승이 되어 예로 막아 뜻을 굽히지 않아 조식과 맞지 않는다.
정사 형옹전: 조조가 아들들의 속관으로 법도 있는 이를 구해 형옹을 평원후 조식의 가승으로 삼았다. 형옹이 예로 막고 굽히지 않아 조식과 맞지 않았고, 유정이 조식에게 형옹을 가볍게 대하지 말라고 간하는 글을 보냈다. 조식 평원후는 211년.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2 본 「遂以爲平原侯植家丞顒防闲以禮無所屈撓由是不合」
조조가 후계를 묻자 서자로 종자를 대신함은 선대의 경계라며 조비를 세우라고 답하고 태자소부가 된다.
정사 형옹전: 태자가 정해지지 않고 임치후 조식이 총애받아 정의 등이 도울 때 조조가 형옹에게 묻자 "서자로 종자를 대신함은 선대의 경계이니 깊이 살피소서"라 했다. 조조가 뜻을 알았고 뒤에 태자소부, 이어 태부로 삼았다. 연도는 본문에 없고 213~217 사이 215년으로 추정.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2 본 「以庶代宗先世之戒也原殿下深重察之」
황초 4년 태상으로 죽는다.
정사 형옹전: 문제 즉위 후 시중·상서복야·사례교위를 거쳐 태상이 되었고 황초 4년(223) 죽었다. 아들 형우가 이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2 본 「子友嗣」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평가 불가 | 군사 지휘 기록은 없고 유성 정벌에 향도를 자청했다(형옹전). |
| 무력 | 평가 불가 | 무용 기록 없음(형옹전). |
| 지력 | 69 | 조식 곁에 있으면서도 "서자로 종자를 대신함은 선대의 경계"라며 태자 문제에 바른 뜻을 냈다(형옹전). |
| 정치 | 68 | 행당령으로 농상을 권해 풍속이 크게 행해졌다(형옹전). |
| 매력 | 72 | "덕행이 당당한 형자앙"이라 불렸다(형옹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형옹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