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4일, 頼朝가 椙山 안 堀口 부근에 진을 쳤으나 大庭景親가 3000여 기로 거듭 쫓아 오니 뒷산 봉우리로 피했다. 加藤景廉·大見実政 등이 뒤에 남아 막았고, 활을 쏘아 싸웠으며 말이 맞아 죽은 자가 많았다. 화살이 다하자 景廉이 말고삐를 잡고 깊은 산으로 이끌었다. (아즈마카가미 吾妻鏡 卷1 治承四年8月24日条 (zh_吾妻鏡_卷001.wiki 174행))
9월 13일, 頼朝가 安房國을 나와 上総國으로 향했고 따르는 정병이 300여 기였으나 上総広常의 군사 소집이 늦었다. 이날 千葉介常胤이 아들·친류를 거느리고 源家에 오려 했고, 胤頼가 國의 目代(平家 편)를 먼저 치자고 하여 常胤이 허락했다. 胤頼와 조카 成胤이 습격해 불을 놓고 목대의 목을 얻었다. (아즈마카가미 吾妻鏡 卷1 治承四年9月13日条 (zh_吾妻鏡_卷001.wiki 212행))
9월 19일, 上総権介広常이 國의 군세를 이끌고 2만 기로 隅田河邊에 와서 頼朝를 뵈었다. 頼朝는 늦게 온 것을 노했으나 広常은 겉으로 복종하는 모양을 갖추면서도 속으로 두 마음을 품고 있었으나, 늦게 온 것을 꾸짖는 頼朝의 기색이 「人主의 풍모」에 맞는다고 보아 해칠 마음을 바꿔 화순하게 따랐다고 한다. (아즈마카가미 吾妻鏡 卷1 治承四年9月19日条 (zh_吾妻鏡_卷001.wiki 220행))
10월 2일, 頼朝가 常胤·広常 등의 배로 大井·隅田 두 강을 건너 정병 3만여 기로 武藏國으로 향했다. 豊島清元·葛西清重 등이 맨 먼저 나와 뵈었고, 足立遠元도 맞으러 왔다. 小山 政光의 처 寒河尼가 막내를 데려와 頼朝가 직접 관례를 올려 小山七郎宗朝(후일 朝光)라 했다. (아즈마카가미 吾妻鏡 卷1 治承四年10月2日条 (zh_吾妻鏡_卷001.wiki 238행))
10월 14일, 武田·安田 군이 神野·春田 길로 鉢田 부근에 이르러 甲斐로 향하던 駿河目代 橘遠茂 군과 뜻밖에 마주쳤다. 산봉우리와 바위 길이라 진퇴가 어려웠으나 信光이 景廉 등과 선두에서 싸워 長田入道의 두 아들을 목 베고 遠茂를 사로잡았다. 遠茂의 머리는 富士野 伊堤 부근에 효수했다. (아즈마카가미 吾妻鏡 卷1 治承四年10月14日条 (zh_吾妻鏡_卷001.wiki 260행))
10월 23일, 頼朝가 相摸國府에 이르러 처음으로 勳功賞을 행했다. 北条時政·武田信義·安田義定·千葉常胤·三浦義澄·上総広常 등이 본령 안도 또는 새 은상을 받았고 義澄는 三浦介가 되었다. 항복해 온 大庭景親는 広常에게 맡겨졌다. (아즈마카가미 吾妻鏡 卷1 治承四年10月23日条 (zh_吾妻鏡_卷001.wiki 308행))
4월 9일, 源頼政가 平清盛 토벌을 오래 꾀해 오다가 이날 밤 아들 仲綱 등과 以仁王의 三条高倉御所에 몰래 찾아가 源頼朝 등 源氏를 모아 平氏를 치라고 권했고, 令旨를 내리게 했다. 마침 서울에 있던 陸奥十郎義盛(行家)가 令旨를 들고 東國으로 향하게 했다. (아즈마카가미 吾妻鏡 卷1 治承四年4月9日条 (zh_吾妻鏡_卷001.wiki 45행))
4월 27일, 以仁王의 令旨가 八条院蔵人 行家의 손으로 伊豆國 北条舘의 頼朝에게 도착했다. 頼朝는 水干 차림으로 石清水(男山) 쪽을 먼저 멀리 절하고 令旨를 펴 읽었다. 行家는 甲斐·信濃 源氏에게 알리러 그쪽으로 떠나기로 했다. (아즈마카가미 吾妻鏡 卷1 治承四年4月27日条 (zh_吾妻鏡_卷001.wiki 47행))
5월 19일, 以仁王가 15일 몰래 三井寺에 들어갔고 衆徒가 法輪院에 御所를 차렸다는 소문이 서울에 퍼졌다. 이에 源頼政가 近衛河原 저택에 스스로 불을 놓고 자손·가인을 거느려 宮 쪽으로 달려갔다. (아즈마카가미 吾妻鏡 卷1 治承四年5月19日条 (zh_吾妻鏡_卷001.wiki 67행))
5월 26일 새벽 以仁王가 三井寺의 군세가 약해 奈良 衆徒를 의지해 南都로 향했다. 頼政 일족과 衆徒가 따랐고, 平知盛·維盛 등이 2만 기 官兵을 이끌고 쫓아 宇治 부근에서 합전했다. 頼政·仲綱·兼綱 등이 목 베이고, 宮도 光明山 鳥居 앞에서 돌아가셨다(30세)고 한다. (아즈마카가미 吾妻鏡 卷1 治承四年5月26日条 (zh_吾妻鏡_卷001.wiki 73행))
8월 4일, 山木判官 平兼隆(伊豆에 유배된 사람, 平氏 일족)를 먼저 칠 계획을 세우고, 京에서 온 遊客 邦通을 兼隆의 舘에 보내 며칠 묵게 하며 산천·마을의 지형을 모두 그려 오게 했다. 이날 돌아온 邦通의 그림을 頼朝가 北条時政과 함께 폈다. (아즈마카가미 吾妻鏡 卷1 治承四年8月4日条 (zh_吾妻鏡_卷001.wiki 99행))
8월 17일, 三嶋社 神事 날 佐々木 네 형제(定綱·経高·盛綱·高綱)가 홍수로 뒤늦게 도착했다. 밤 자시에 北条時政이 兼隆의 후견 堤信遠(山木 북쪽)을 먼저 치게 하여 経高의 첫 화살이 「源家가 平氏를 정벌하는 맨 처음 화살」이 되었고 信遠을 죽였다. 兼隆 館 앞 天滿坂 부근에서도 화살을 쏘았으나 낭종 다수가 三嶋社 참배로 빠져 있었다. 頼朝가 직접 薙刀를 景廉에게 주어 山木으로 가 兼隆의 목을 가져오게 하니 盛綱·景廉이 館에 들어가 목을 얻고 室屋에 불을 놓았다. 새벽에 頼朝가 縁에서 兼隆 주종의 목을 보았다. (아즈마카가미 吾妻鏡 卷1 治承四年8月17日条 (zh_吾妻鏡_卷001.wiki 116행))
8월 23일 밤 비 속에서 頼朝가 北条時政 부자·盛長·茂光·実平 등 300기와 相模國 石橋山에 진을 쳤다. 令旨를 깃발 위에 달았다. 같은 國 大庭景親·俣野景久 등 平家 被官 3000여 기가 石橋山 근처에 진을 쳐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아즈마카가미 吾妻鏡 卷1 治承四年8月23日条 (zh_吾妻鏡_卷001.wiki 172행))
8월 27일, 三浦介義明(89세)이 河越重頼·江戸重長 등에게 목 베였다. 義澄 등은 安房國으로 향해 北条時政·義実 등과 土肥郷 岩浦에서 배를 타 房州로 떠났고, 바다 위에서 三浦 사람들과 마주쳤다. 景親는 수천 기로 三浦를 공격했으나 義澄 등이 이미 바다를 건넌 뒤라 돌아갔다. (아즈마카가미 吾妻鏡 卷1 治承四年8月27日条 (zh_吾妻鏡_卷001.wiki 180행))
8월 29일, 頼朝가 実平과 작은 배로 安房國 平北郡 猟島에 닿았다. 北条時政 이하가 맞아 절하고 며칠의 울적함이 일시에 풀렸다. (아즈마카가미 吾妻鏡 卷1 治承四年8月29日条 (zh_吾妻鏡_卷001.wiki 184행))
10월 6일, 頼朝가 相摸國에 들어갔다. 畠山重忠이 선봉, 常胤이 후방을 맡았고 따르는 군사가 수천만이라 하며, 서둘러 민가를 숙소로 정했다. (아즈마카가미 吾妻鏡 卷1 治承四年10月6日条 (zh_吾妻鏡_卷001.wiki 246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