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생년 불명 — 생몰년 원문에 없음. 여후의 큰오빠. 본기는 「周呂侯」, 유후세가는 「建成侯呂澤」으로 적는다(본기는 건성후를 작은오빠 여석지로 적어 두 사기가 갈린다).
사망 몰년 불명 — 사망 연도 원문에 없음. 본기에 「長兄周呂侯死事」(일하다 죽음)로만 나온다.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196년 | 장안 | 장군 · 후(周呂侯/建成侯)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209~-197년 | 한 | 장군 · 후(周呂侯/建成侯) | 불명 |
| -196년 | 한 | 장군 · 후(周呂侯/建成侯) | 기록 |
| -195년 | 기타 | (해당 연도 역할 불명) | 불명 |
고조가 태자를 갈아치우려 하자 여후가 여택에게 장량을 압박하게 하고, 장량의 계책대로 상산사호를 맞아 자기 집에 객으로 둔다. 한 11년 영포가 반하자 사호의 말을 여후에게 전해 태자가 군을 맡지 않게 한다.
정사 유후세가: 고조가 태자를 폐하려 하자 여후가 건성후 여택을 시켜 장량을 협박하게 했고, 장량이 천하가 부르지 못하는 4명을 태자 곁에 두라고 계책을 내자 여후가 여택을 시켜 서신과 예물로 이들을 맞아 오게 했다. 한 11년 영포가 반하자 사호가 여택에게 태자가 군을 이끌면 위험하다 했고, 여택이 밤에 여후를 찾아 이를 전해 고조가 직접 출정했다. (태자 폐립 압박의 시기는 한 11년 이전, 원문에 연도 없음)
출전: 史記 卷055 「呂后乃使建成侯呂澤劫留侯」 / 史記 卷055 「四人至客建成侯所」 / 史記 卷055 「於是呂澤立夜見呂后」
정사 항우본기·고조본기·자치통감: 한 2년 봄, 한왕이 다섯 제후의 병력 56만을 이끌고 동쪽으로 초를 치러 4월 팽성에 들어가 재물과 미인을 거두고 날마다 잔치를 벌였다. 항우는 제를 치다가 장수들에게 제를 맡기고 정병 3만으로 노(魯)에서 호릉으로 내려와 소현에서 서쪽으로 틀어 새벽에 한군을 쳐 동쪽 팽성에 이르렀고 한낮에 한군을 크게 깼다. 한군은 곡수·사수에 빠져 10여만이 죽고, 남쪽 산으로 달아난 군은 영벽 동쪽 수수에서 몰려 다시 10여만이 수수에 들어가 강이 흐르지 못했다. 한왕이 세 겹으로 에워싸였을 때 서북에서 큰바람이 불어 초군이 어지러워진 틈에 수십 기로 달아났고, 하읍의 여후 오라비 주려후에게 가 병사를 모았다. 제후들은 한을 등지고 초로 돌아섰다. 56만과 3만이라는 수는 원문 숫자 그대로이며 사료 비판은 하지 않았다.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53 | 여후의 큰오빠로 장군이었고 전쟁 중 죽었다(「呂后兄二人皆爲將長兄周呂侯死事」, 여태후본기). |
| 무력 | 60 | 일을 하다 전사한 기록(「死事」)만 있다. |
| 지력 | 50 | 장량을 위협해 계책을 얻어 낸 일이 있다(유후세가). |
| 정치 | 50 | 태자를 지키는 일에서 여후의 심부름 역할을 했다(유후세가). |
| 매력 | 50 | 여후의 뜻으로 장량을 협박해(「劫留侯」) 계책을 얻어 냈다(유후세가).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여택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