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張敖) — 사기·한서 기준 생애·이동 경로·능력치 근거

조출생 생년 불명사망 -182년기록 연도 6해

생몰

출생 생년 불명 — 생년 원문에 없음. 장이의 아들

사망 -182년 — 고후 6년(-182) 사망(「張敖髙后六年薨」, 장이진여열전). 아들 장언이 노원왕이 되었다.

연도별 위치

연도지명직책근거
-209년진(陳)성도군기록
-207년거록(조 장이의 아들 — 행적 불명)기록
-202년한단조왕기록
-200년한단조왕기록
-199년백인조왕기록
-198년장안선평후기록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연도별 직책·소속

연도소속직책근거
-209년기타성도군기록
-208년조(조 장이의 아들 — 행적 불명)불명
-207년조(조 장이의 아들 — 행적 불명)기록
-206~-203년조(조 장이의 아들 — 행적 불명)불명
-202년조조왕기록
-201년조조왕불명
-200~-199년조조왕기록
-198년한선평후기록
-197~-195년한선평후불명

나온 사건·전투

-209년 · 성도군

진승이 아버지 장이 등 무신 일행의 가족을 궁중에 옮겨 가둔 뒤 장오를 성도군으로 봉한다.

정사 장이진여열전: 무신이 조왕을 칭한 것을 안 진승이 노했으나 상국 방군이 간해 무신 등의 가족을 궁중으로 옮겨 가두고 장이의 아들 오를 성도군에 봉했다.

출전: 史記 卷089 「徙系武臣等家宮中封張耳子敖爲成都君」

-207년 · (조 장이의 아들 — 행적 불명)

거록이 포위되자 북쪽 대에서 병력 1만여 명을 모아 와 진여 옆에 진을 쳤으나 감히 진군을 치지 못한다.

정사 장이진여열전: 연·제·초가 조의 위급을 듣고 구원하러 왔다. 장오도 북쪽 대의 병력 1만여 명을 모아 와 진여 곁에 진을 쳤으나 감히 진군을 치지 못했고, 항우가 왕리를 사로잡은 뒤에야 제후군이 비로소 진을 쳤다.

관련: 거록 전투

출전: 史記 卷089 「張敖亦北收代兵得萬餘人來皆壁餘旁未敢撃秦」

-202년 · 조왕

한 5년 아버지 장이가 죽자 조왕을 잇고 고조의 맏딸 노원공주가 왕후가 된다.

정사 장이진여열전: 한 5년 장이가 죽어 시호를 경왕이라 했고 아들 오가 조왕을 이었다. 고조의 맏딸 노원공주가 조왕 오의 왕후가 되었다.

출전: 史記 卷089 「漢五年張耳薨謚爲景王子敖嗣立爲趙王髙祖長女魯元公主爲趙王敖后」

-200년 · 조왕

한 7년, 평성에서 돌아오던 고조가 조를 지나자 아침저녁으로 소매를 걷고 직접 음식을 올리는 등 사위의 예를 다하나 고조는 걸터앉아 꾸짖고 업신여긴다. 조 상국 관고·조오 등이 시해를 권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가 나도록 거절한다.

정사 장이진여열전: 한 7년 고조가 평성에서 돌아오다 조를 지나자 조왕 오가 아침저녁으로 소매를 걷고 직접 음식을 올려 사위의 예를 다했으나 고조는 다리를 뻗고 앉아 꾸짖고 업신여겼다. 관고·조오 등이 시해를 권하자 장오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며 「君何言之誤」라 거절했다. 관고 등은 왕을 더럽히지 않고 일을 우리가 한다고 서로 다짐했다.

출전: 史記 卷089 「漢七年髙祖從平城過趙趙王朝夕袒韛蔽自上食禮甚卑有子婿禮」 / 史記 卷089 「張敖齧其指出血曰君何言之誤」

-199년 · 조왕

한 8년, 동원에서 돌아오던 고조가 조를 지나자 관고 등이 백인의 측간 벽 속에 숨어 습격하려 하나 고조는 「柏人者迫於人也」라며 묵지 않고 떠난다.

정사 장이진여열전: 한 8년 고조가 동원에서 돌아오다 조를 지나자 관고 등이 백인에 사람을 벽 속에 숨겨 측간에서 기다렸다. 고조는 묵으려다 마음이 움직여 현 이름을 묻고 「柏人者迫於人也」라며 묵지 않고 떠났다. 장오는 이 모의를 몰랐다.

출전: 史記 卷089 「漢八年上從東垣還過趙貫髙等乃壁人柏人要之置廁」 / 史記 卷089 「柏人者迫於人也不宿而去」

-198년 · 선평후

한 9년, 관고의 원한 가진 자가 변을 고하자 장오가 관고와 함께 체포되어 장안으로 압송되나, 관고가 고문을 견디며 왕이 모른다고 증언한 뒤 사면되고 선평후로 강등된다.

정사 장이진여열전: 한 9년 관고의 원한을 품은 자가 변을 고해 고조가 조왕과 관고를 체포했다. 관고는 고문 수천 대를 견디며 「獨吾屬為之王實不知」라 진술했고, 설공이 확인하자 고조가 조왕을 사면했다. 장오는 노원공주 때문에 선평후로 봉해졌다.

출전: 史記 卷089 「漢九年貫髙怨家知其謀乃上變告之於是上皆并逮捕趙王貫髙等」 / 史記 卷089 「上乃赦趙王」 / 史記 卷089 「張敖已出以尚魯元公主故封爲宣平侯」

능력치와 근거

항목전성기 수치근거
통솔41거록 구원 때 대에서 1만여 명을 모아 와 진여 곁에 진을 쳤으나 감히 진군을 치지 못했다(장이진여열전).
무력평가 불가무용 기록은 없다.
지력50신하들이 고조를 시해하자고 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가 나도록 거절했다(장이진여열전). 모의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정치56조왕이 되어 고조에게 극진히 예를 갖췄으나 관고 사건으로 왕위에서 물러나 선평후가 되었다(장이진여열전).
매력69조 상국 관고가 「吾王孱王也」라 했으나 끝까지 장오를 지키려 고문을 견뎠고, 장오의 객들은 뒷날 여러 제후의 상·군수가 되었다(장이진여열전).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장오의 이동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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