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스트를레 「연대기」: 정사 사료. 다루는 해 1400년 ~ 1408년, 사건 71건을 해 순서로 정리했습니다. 원문 라이선스와 출처 포함.
| 등급 | 정사 |
|---|---|
| 시점 | 외부 시점 |
| 다루는 해 | 1400년 ~ 1408년 |
| 사건 수 | 사건 71건 · 지도에 놓은 58건 |
| 저자 | Enguerrand de Monstrelet |
| 원제 | Chronique d'Enguerrand de Monstrelet |
지역 분포: 서유럽(프랑스·브리튼·저지대·독일) 66 · 남유럽(이탈리아·그리스·이베리아·발칸) 5
| 해 | 장소 | 사건 | 원문 위치 |
|---|---|---|---|
| 1400년 | Paris | 아라곤 종자 미셸 도리스가 파리에서 잉글랜드 기사들에게 무장 결투를 도전하는 편지를 보냄 | vol1 CHAP. II |
| 1400년 | Rome | 로마에서 대사면이 열려 전국에서 순례자가 몰렸고, 전염병으로 많은 순례자가 죽음 | vol1 CHAP. III |
| 1401년 | Brittany | 브르타뉴 공 존 드 몽포르가 죽고 장남 존이 뒤를 이음 | vol1 CHAP. IV |
| 1401년 | London | 콘스탄티노폴리스 황제가 파리 체류를 마치고 잉글랜드를 방문해 헨리 4세에게 극진히 대접받은 뒤 귀국 | vol1 CHAP. IV |
| 1401년 | Leulinghem | 영국에서 돌아온 왕비 이사벨라가 레울렝엄에서 생폴 백작에게 인계되어 프랑스 측으로 넘어옴 | vol1 CHAP. IV |
| 1401년 | Nantes | 부르고뉴 공이 왕의 이름으로 브르타뉴를 접수하러 낭트에 가서 공작미망인과 협상하고 요새에 수비대를 둠 | vol1 CHAP. V |
| 1401년 | Luxembourg | 오를레앙 공이 보헤미아 왕의 동의를 받아 룩셈부르크 공국을 접수하고 여러 성에 수비대를 둠 | vol1 CHAP. V |
| 1401년 | Paris | 오를레앙 공과 부르고뉴 공이 다투어 각각 무장병을 파리 둘레에 모았고, 왕비와 베리·부르봉 공의 중재로 병력을 돌려보냄 | vol1 CHAP. V |
| 1401년 | Frankfurt am Main | 클레멘트 공이 독일 황제로 선출된 뒤 프랑크푸르트를 포위, 40일 뒤 도시가 항복. 포위 중 군중에 전염병이 돌아 1만5천 명이 죽음 | vol1 CHAP. VI |
| 1401년 | Lombardy | 황제가 롬바르디아 통로를 잡으려 보낸 선발대가 밀라노 공의 군대에 져서 많은 포로가 나고, 황제 원정이 무산됨 | vol1 CHAP. VI |
| 1401년 | Northumberland | 헨리 4세가 퍼시 가문과 웨일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을 무찌름. 토머스 퍼시는 전사하고 더글러스 백작은 사로잡힘 | vol1 CHAP. VII |
| 1402년 | Coucy-le-Château-Auffrique | 에노 대관 장 드 베르셴이 여러 나라에 무장 결투를 청하고 쿠시에서 기다렸으나 응전자가 없었음. 이후 성 야고보 순례길에서 일곱 곳 칠 일 동안 시합 | vol1 CHAP. VIII |
| 1402년 | Coucy-le-Château-Auffrique | 오를레앙 공 루이가 쿠시에서 헨리 4세에게 백 명씩 겨루는 무장 결투를 제안하며 장소로 보르도를 지정 | vol1 CHAP. IX |
| 1402년 | London | 헨리 4세가 런던에서 답신해 백 명 규모 결투를 거절하고, 두 사람의 일대일 결투만 받겠다고 함 | vol1 CHAP. IX |
| 1402년 | Plymouth | 라 마르슈 백작 자크 드 부르봉이 프랑스 배로 잉글랜드 플리머스 항구를 들이쳐 불과 칼로 부숨 | CHAP. XI · part_02 L116–118 |
| 1402년 | 리처드 2세가 죽자 오를레앙 공이 헨리 랭커스터(헨리 4세)에게 도전장을 보내 결투를 청함 | part_04 줄 976 | |
| 1403년 | 브르타뉴 제독 측 함대가 잉글랜드 함대와 바다에서 싸워 이김 — 포로 약 2,000명, 돛배 40척, 카락선 1척 | CHAP. XII · part_02 L158–164 | |
| 1403년 | Paris | 파리 대학 행렬 때 사빌루아 경의 하인들이 학생을 공격한 싸움 뒤, 사빌루아 저택 헐리고 그는 추방 | CHAP. XIII · part_02 L216–219 |
| 1403년 | Valencia | 아라곤 왕 앞 발렌시아 궁정 시합장에서 4대 4 생사결투 — 왕이 중단시키고 양측을 화해시킴 | CHAP. XIV · part_02 L272–273 |
| 1403년 | Dartmouth | 브르타뉴·노르망디 기사단이 잉글랜드 다트머스 상륙을 시도 — 교전에서 패배, 샤토 영주 전사, 포로 약 100명 | CHAP. XIV · part_02 L365–368 |
| 1403년 | Haverfordwest | 프랑스·웨일스 원정대가 웨일스 해버퍼드웨스트 항구를 점령해 주민 학살, 주변 땅을 불사르고 카마던 쪽 진군 | CHAP. XV · part_02 L389–400 |
| 1403년 | Worcester | 원정대가 우스터 근처에서 잉글랜드 왕 군과 8일간 대치 — 저녁에 왕이 우스터로 물러남, 프랑스·웨일스 군은 짐마차 18대 노획 | CHAP. XV · part_02 L402–425 |
| 1403년 | 티무르(타메를란)가 바예지드(바야지트) 군을 6시간 싸움 끝에 격파, 바예지드 포로 — 사료 기년 1403 | CHAP. XVI · part_02 L471–474 | |
| 1404년 | Halle | 부르고뉴 공 필리프 할레(벨기에 에노)에서 사망, 시신은 디종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으로 옮겨짐 | CHAP. XVIII · part_02 L542–543 |
| 1404년 | 생폴 백작 왈러런이 기사 약 1,600명을 이끌고 와이트 섬에 상륙해 마을 몇 곳을 불태움 — 현지 사제의 몸값 제안이 시간 끌기 속임수로 드러나 빈손으로 철수 | CHAP. XIX · part_02 L602–604, L619–621 | |
| 1404년 | Marseilles | 루이 오를레앙 공이 교황을 만나러 샹파뉴·부르고뉴·리옹을 거쳐 마르세유로 감 — 사료는 교황을 「그레고리」로 적음 | CHAP. XX · part_02 L637–641 |
| 1405년 | Merck-Saint-Liévin (사료 Mercq) | 칼레 수비 잉글랜드 군이 메르크(Mercq) 성 공성 중인 프랑스군을 기습 격파 — 프랑스 측 60여 명 전사, 포로 60~80명 | CHAP. XXIV · part_02 L879–893 |
| 1405년 | Corbeil-Essonnes | 부르고뉴 공 장, 왕비·오를레앙 공이 도팽을 빼돌리는 것을 코르베유 근처에서 따라잡아 파리로 되돌림 | CHAP. XXV · part_02 L1001–1011, L1029–1031 |
| 1405년 | Paris | 오를레앙 측 군이 멜룽에서 파리로 진군 — 파리 시민은 부르고뉴 편, 샤랑통에서 두 공이 화해하는 척 결말 | CHAP. XXV · part_02 L1305–1309, L1362–1363 |
| 1406년 | Paris | 잉글랜드 사신(펨브룩 백작·세인트데이비드 주교)이 휴전과 왕녀 이사벨 혼담을 요구 — 프랑스 왕실 회의가 전부 거절 | CHAP. XXVI · part_02 L1398–1419 |
| 1406년 | Compiègne | 콩피에뉴에서 혼인 두 건 — 투렌 공과 잭린 드 바비에르, 샤를 도를레앙과 이사벨(전 잉글랜드 왕비); 오를레앙·부르고뉴 두 공이 우정을 맹세 | CHAP. XXVII · part_02 L1469–1479, L1494–1495 |
| 1406년 | Neufchâteau | 로렌 공과 바르 공의 전쟁 중 클뉘네 드 브라반트 제독이 군을 이끌고 노이프샤토를 포위, 바로 왕 측에 항복 | CHAP. XXVII · part_02 L1523–1528 |
| 1406년 | Bourg (Gironde) | 오를레앙 공이 6,000명 군으로 아키텐을 공략, 르 부르(Le Bourg) 포위 석 달 — 무위에 파리로 철수 | CHAP. XXVIII · part_02 L1568–1570, L1580–1582, L1599–1603 |
| 1406년 | Saint-Omer | 부르고뉴 공이 칼레 공략을 위해 모은 군대가 생오메르에 집결했다가 왕의 명령으로 해산 — 11월 11일 밤 | CHAP. XXIX · part_02 L1625–1626, L1645–1659 |
| 1406년 | Bouillon | 리에주 측이 부이옹(Bouillon)을 강습해 점령, 안에 있던 자는 모두 죽임 — 바비에르 장 주교 측과 전쟁 시작 | CHAP. XXXI · part_02 L1778–1781 |
| 1406년 | Maastricht | 브라반트 안토니 공이 마스트리히트를 무력 복종시키려 했으나, 리에주 측 2만 명 집결 뒤 비밀 교섭으로 무혈 해산 | CHAP. XXXII · part_02 L1859–1865 |
| 1406년 | Compiègne | 부르고뉴 공과 오를레앙 공이 맹약을 다시 맺음(주교·귀족·성직자 앞, 콩피에뉴 연회에서 신하들까지 맹세) — 살해 한 해 전 | part_04 줄 341 |
| 1407년 | Scotland | 웨일스 공 헨리(왕자)가 기사 1,000·궁수 6,000을 이끌고 스코틀랜드에 침입 — 스코틀랜드 측은 맞서지 않고 휴전을 1년 연장 | CHAP. XXXV · part_02 L2033–2041, L2053–2055 |
| 1407년 | Paris | 부르고뉴 공 장의 지시를 받은 암살단 18명이 파리 포르트 바르베트 근처에서 오를레앙 공 루이를 살해 — 공이 나중에 공개로 배후 자백 | CHAP. XXXVI · part_02 L2081–2083, L2142–2146, L2247–2249 |
| 1407년 ~ 1408년 | Amiens | 부르고뉴 공 장이 두 동생과 3,000명을 이끌고 아미앵에 가서 시칠리아 왕·베리 공과 회담 — 장은 사과를 거부, 결렬 | CHAP. XXXVIII · part_02 L2497–2503, L2530–2535 |
| 1407년 ~ 1408년 | Paris | 부르고뉴 공 장이 파리 생폴 궁에서 장 프티(신학박사)를 시켜 오를레앙 공 살해를 정당화하는 연설 — 왕과 대신들 앞 | CHAP. XXXIX · part_02 L2625–2628 |
| 1407년 ~ 1408년 | Paris | 부르고뉴 공 쪽 연설(장 쁘띠)의 소전제: 오를레앙 공 루이가 재물·명예욕에 빠져 마법·독으로 국왕을 해치려 했다고 주장. 살해 정당화 논변이다. | part03 「SEQUITUR MINOR」 |
| 1407년 ~ 1408년 | Melun | 왕비 이사벨이 왕자들과 함께 파리를 떠나 멜룽 성에 머묾(자식 안전 우려). | part03 CHAP. XL 끝 (왕 회복·사면 바로 앞) |
| 1407년 ~ 1408년 | Paris | 왕이 병에서 회복되자 부르고뉴 공이 찾아와 화해하고, 오를레앙 공 사건에 대한 사면장을 받음. | part03 CHAP. XL 끝 |
| 1407년 ~ 1408년 | Paris | 파리 왕궁 미사 중 교황의 편지를 받고 왕과 신하 전체가 파문됐음을 알게 됨. 왕은 교황에 대한 순종을 거둠. | part03 CHAP. XL (교황 편지 처리) |
| 1407년 ~ 1408년 | Porto Venere | 교황 베네딕투스가 왕에게 보낸 편지(3월 23일, 제노바 교구 포르토 베네레 발)에서 평화 약속 파기와 왕의 불복을 꾸짖음. | part03 CHAP. XL 「The apostolical letter」 |
| 1407년 ~ 1408년 | Marseille | 교황 파문 칙서(3월 23일, 마르세유 생빅토르 발)가 왕과 추종자, 대학까지 파문함. | part03 CHAP. XL 「THE BULL OF THE POPE DELLA LUNA」 |
| 1407년 ~ 1408년 | 오를레앙 공 과부 쪽 연설의 주장: 부르고뉴 공이 오를레앙 공을 살해하도록 시킴. 원문은 장소 없음. | part03 CHAP. XLIV (과부 연설 중 셋째 논변) | |
| 1407년 | Paris | 살해 다음 목요일, 부르고뉴 공이 상복으로 시신을 길레맹 교회에서 셀레스탱 교회까지 따라감 | part_04 줄 440 |
| 1407년 | Paris | 부르고뉴 공이 왕과 베리 공 앞에 무릎 꿇고 살해를 자백, 악마의 부추김이었다고 말함 | part_04 줄 468 |
| 1407년 | Paris | 부르고뉴 공이 자백 뒤 파리를 급히 떠남 — 행선지는 본문에 없음 | part_04 줄 485 |
| 1407년 | Paris | 오를레앙 공이 파리 대학에 연설: 교황 대립 해소를 위해 아들을 볼모로 보내겠다고 제안 — 살해 3주 전 | part_04 줄 695 |
| 1407년 | Rome | 장 프티가 로마에서 그레고리 교황 앞에 변론(교회 대분열 해소 문제를 놓고, 1407년 7월 20일) | part_04 줄 2092 |
| 1408년 | Paris | 파리 대학 대표 장 쿠르트뢰즈가 왕과 제후 앞 대홀 공개 회의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반대를 선언. | part03 CHAP. XLI 첫 단락 |
| 1408년 | Paris | 대학 요구대로 왕이 허락하자 대학 총장이 교황 칙서를 회중 앞에서 찢음. 칙서 전달자 쪽 인사들이 체포·투옥됨. | part03 CHAP. XLI (대학 요구 뒤) |
| 1408년 | Perpignan | 교황 베네딕투스가 왕의 노여움에 놀라 포르토 베네레에서 배를 타고 떠나 아라곤을 거쳐 페르피냥으로 감(추기경 넷만 동행). | part03 CHAP. XLI (칙서 파기 뒤) |
| 1408년 | 시칠리아 왕 루이가 국왕에게 작별하고 파리를 떠나 프로방스로 감(나폴리 라디슬라오 측 세력 견제). | part03 CHAP. XLI (교황 칙서 뒤) | |
| 1408년 | Melun | 왕비가 멜룽에 머무는 동안 왕이 멜룽에 가서 며칠 머문 뒤 파리로 돌아옴. | part03 CHAP. XLI (시칠리아 왕 뒤) |
| 1408년 | 프랑스 왕이 웨일스 사절에게 1년 치 병사 300명과 석궁병 200명을 지원, 보르그 드 라 외즈 지휘로 웨일스로 보냄. | part03 CHAP. XLI (스코틀랜드 사절 뒤) | |
| 1408년 | Arras | 7월 5일 부르고뉴 공이 두 동생을 데리고 파리를 떠나 아라스로 감(주교 생일 축하가 명목). | part03 CHAP. XLII 첫 단락 |
| 1408년 | Ghent | 아라스를 거쳐 헨트로 가서 공작 부인을 방문. | part03 CHAP. XLII 첫 단락 |
| 1408년 | Maastricht | 리에주 주교 존(바이에른) 측 피신처 마스트리흐트가 리에주 쪽 군대에 포위됨(지휘 드 피에룰스 영주). | part03 CHAP. XLII 둘째 단락 |
| 1408년 | Florennes | 에노 백(빌헬름) 측 군대가 포세·플로렌 일대로 진군해 요새를 탈취하고 불과 칼로 주민을 죽이며 파괴함. | part03 CHAP. XLII 셋째 단락 |
| 1408년 | 스페인 왕이 24척으로 사라센 함대 22척과 싸워 격파하고 승무원 전원을 죽임(그라나다 전쟁 중). | part03 CHAP. XLII 넷째 단락 | |
| 1408년 | Rome | 헝가리 왕이 로마에서 파리 대학에 답서를 보내 교회 분열 종식을 호소하고 프랑스 왕족 파견을 청함. | part03 CHAP. XLII 마지막 단락(헝가리 왕 편지) |
| 1408년 | Paris | 성직자·대리인을 파리 대홀로 소집한 총회. 대학 측 신학자가 교황 베네딕투스를 이단·분열자로 규탄하고 중립 선언을 결의. | part03 CHAP. XLIII 첫 단락~ |
| 1408년 | Paris | 교황 쪽 사절 두 명(아라곤인)이 쓰레기 수레에 실려 기둥에 세워져 '교회와 왕의 불충한 반역자' 라벨을 달고 전시됨. | part03 CHAP. XLIII (총회 중) |
| 1408년 | Paris | 왕비와 왕세자가 멜룽에서 파리로 돌아와 루브르에 묵음. | part03 CHAP. XLIII (총회 뒤) |
| 1408년 | Paris | 오를레앙 공(아들)이 기병 약 300명을 이끌고 파리에 와 루브르에서 왕비·아키텐 공을 만남, 사법 요구를 호소. | part03 CHAP. XLIV 첫 단락 |
| 1408년 | Paris | 오를레앙 공 과부 쪽이 루브르 대홀에서 글을 낭독(수도원장)해 부르고뉴 공을 살인 혐의로 고발하고 정의를 요구하는 공개 연설. | part03 CHAP. XLIV 둘째 단락~ |
| 1408년 | Paris | 오를레앙 쪽 연설의 주장: 부르고뉴 공이 국왕 명령(200명 이하)을 어기고 600명 넘는 무장 병력을 이끌고 파리에 들어옴. | part03 CHAP. XLIV (과부 연설 여섯째 논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