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생년 불명 — 생년 기록 없음(유표의 장남)
사망 209년 — 건안 14년(209) — 병사. 전문은 「琦病死」, 시기는 적벽 직후·유비의 형주목 추대 이전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08년 | 하구 | (유표 장남·강하태수) | 기록 |
| 209년 | 하구 | 형주자사(유비가 표천) | 추정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208년 | 유표 | (유표 장남·강하태수) | 기록 |
| 209년 | 촉한 | 형주자사(유비가 표천) | 추정 |
후처의 말에 휘둘린 부친의 눈 밖에서 제갈량에게 계책을 구하고 황조가 죽자 강하태수로 나간다.
정사 제갈량전: 유표가 후처의 말에 막내 종을 아껴 기를 싫어하자 유기가 제갈량과 자신을 보전할 계책을 도모하려 했으나 제갈량이 거절했고, 유기가 높은 누각에서 사다리를 치우고 말하게 하자 제갈량이 "신생은 안에서 위태롭고 중이는 밖에서 안전했다"고 답했다. 마침 황조가 죽어 유기는 강하태수가 되었다.
연의: 연의 40회
출전: 三國志 卷35 「君不見申生在內而危重耳在外而安乎」 / 三國志 卷35 「會黃祖死得出遂為江夏太守」
장판에서 쫓긴 유비가 한진에서 관우의 배와 합류하고 유기 군 1만여 명과 하구에 이른다.
정사 선주전: 장판에서 처자를 버리고 달아난 유비가 한진으로 비껴 가 관우의 배와 만나 한수를 건넜고, 유표의 장자인 강하태수 유기의 병력 1만여 명을 만나 함께 하구에 이르렀다.
연의: 연의 42회
출전: 三國志 卷32 「遇表長子江夏太守琦眾萬餘人與俱到夏口」
적벽 뒤 유비가 유기를 형주자사로 표천하고 유기가 병으로 죽자 유비가 형주목으로 추대된다.
정사 선주전: 유비가 유기를 형주자사로 표천하고 4군을 남정했으며, 유기가 병들어 죽자 여러 부하가 유비를 형주목으로 추대해 공안에 치소를 두었다.
연의: 연의 34회
출전: 三國志 卷32 「先主表琦為荊州刺史又南征四郡」 / 三國志 卷32 「琦病死羣下推先主為荊州牧治公安」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50 | 강하태수로 병력 1만여 명을 이끌고 유비와 하구에서 합류했다(선주전). |
| 무력 | 평가 불가 | 무용 기록은 없다. |
| 지력 | 50 | 제갈량에게 자기를 보전할 계책을 구했고 "신생은 안에서 위태롭고 중이는 밖에서 안전했다"는 말에서 강하태수 자리를 받아 냈다(제갈량전). |
| 정치 | 평가 불가 | 정치 업적 기록은 없다. |
| 매력 | 50 | 제갈량이 깊이 인정한 사람이라 적혀 있다(제갈량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유기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