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생년 불명 — 생년 기록 없음
사망 225년 — 전문에 「六年」(황초 6년=225) 병으로 서울에 돌아와 졸 — 연도 해석은 통설을 따름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18년 | 업 | 황문시랑 | 추정 |
| 219년 | 업 | 황문시랑 | 추정 |
| 220년 | 낙양 | 산기상시→중령군 | 기록 |
| 221년 | 상용 | 정남장군·영형주자사 | 기록 |
| 222년 | 강릉 | 정남장군·영형주자사 | 기록 |
| 223년 | 완 | 정남대장군·형주목 | 추정 |
| 224년 | 상용 | 정남대장군·형주목 | 기록 |
| 225년 | 낙양 | 형주목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84~208년 | 기타·재야 | (하후연의 조카·연대 불명) | 불명 |
| 209~217년 | 위 | 군사마→오관장문학 | 불명 |
| 218~219년 | 위 | 황문시랑 | 추정 |
| 220년 | 위 | 산기상시→중령군 | 기록 |
| 221~222년 | 위 | 정남장군·영형주자사 | 기록 |
| 223년 | 위 | 정남대장군·형주목 | 추정 |
| 224년 | 위 | 정남대장군·형주목 | 기록 |
| 225년 | 위 | 형주목 | 기록 |
조조가 낙양에서 죽자 부절을 들고 재궁을 업으로 모신다.
정사 하후상전: 태조가 낙양에서 붕어하자 하후상이 부절을 지니고 재궁을 업으로 모셨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09 「太祖崩於洛陽尚持節奉梓宮還鄴」
유비 별군이 있는 상용을 기습해 3군 9현을 평정한다.
정사 하후상전: 하후상이 "유비 별군이 상용에 있으나 산길이 험해 방비가 없으니 기병을 몰래 보내면 이긴다"고 상주해 군을 이끌고 상용을 격파하고 3군 9현을 평정한 뒤 정남대장군이 되었다.
연의: 연의 76회
출전: 三國志 卷09 「若以奇兵潛行出其不意則獨克之勢也」 / 三國志 卷09 「遂勒諸軍擊破上庸平三郡九縣」
조진 등과 강릉을 포위하고, 야간에 하류로 건너 제갈근 수군을 격파한다.
정사 하후상전: 황초 3년 하후상이 조진과 강릉을 포위하자 손권의 장수 제갈근이 강 가운데 모래톱에 군을 두었는데, 하후상이 밤에 유선을 많이 싣고 보기 1만여 명으로 하류로 몰래 건너 제갈근 군을 양쪽에서 불태우며 격파했다. 큰 역병이 돌아 철군했다.
연의: 연의 76회
출전: 三國志 卷09 「尚夜多持油舩將步騎萬餘人於下流潛渡」 / 三國志 卷09 「會大疫詔勑尚引諸軍還」
상용에서 서쪽으로 7백여 리 길을 내 산민·만이를 복속시킨다.
정사 하후상전: 형주는 황폐하고 오와 한수를 경계로 맞대 구민이 강남에 많이 살았는데, 하후상이 상용에서 길을 내 서쪽 700여 리를 가자 산민과 만이가 복속해 5, 6년 사이 수천 호가 귀부했다.
연의: 연의 76회
출전: 三國志 卷09 「尚自上庸通道西行七百餘里」
병이 깊어 서울로 돌아와 죽는다.
정사 하후상전: 황초 6년 병이 깊어져 서울로 돌아왔고 문제가 자주 방문해 손을 잡고 울었다. 시호는 도후.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09 「尚疾篤還京都帝數臨幸執手涕泣」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78 | 상용을 격파해 3군 9현을 평정하고 강릉 포위 때 제갈근 군을 협공으로 격파했다(하후상전). |
| 무력 | 72 | 야간에 유선(油船)으로 하류를 몰래 건너 제갈근의 수군을 협공해 불태웠다(하후상전). |
| 지력 | 75 | 유비 별군이 상용에 있다며 "산길이 험하니 기병으로 몰래 가면 이길 수 있다"고 건의했다(하후상전). |
| 정치 | 70 | 형주 변경에서 상용으로 길을 내 7백여 리를 서쪽으로 가며 산민·만이를 복속시켜 5~6년 사이 수천 호가 귀부했다(하후상전). |
| 매력 | 63 | 문제와 포의지교를 맺었다는 평(배송지 주 ― 魏書).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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