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앵빌의 성왕 루이전: 정사 사료. 다루는 해 1226년 ~ 1270년, 사건 78건을 해 순서로 정리했습니다. 원문 라이선스와 출처 포함.
| 등급 | 정사 |
|---|---|
| 시점 | 내부 시점 |
| 다루는 해 | 1226년 ~ 1270년 |
| 사건 수 | 사건 78건 · 지도에 놓은 53건 |
| 저자 | Jean de Joinville |
| 원제 | Histoire de saint Louis |
지역 분포: 이집트·북아프리카 53 · 서아시아 18 · 서유럽(프랑스·브리튼·저지대·독일) 7
| 해 | 장소 | 사건 | 원문 위치 |
|---|---|---|---|
| 1226년 ~ 1270년 | Fontainebleau | 루이가 퐁텐블로에서 큰 병을 앓을 때 맏아들에게 백성의 사랑을 받으라고 당부했다(§21). | §21 (줄 1862–1863) |
| 1241년 | Saumur | 루이 왕이 앙주의 소뮈르에서 큰 궁정 회의를 열고, 식탁 자리 배치를 서술. 조앵빌도 참석 | §93 (장 XXI), part_02 L1233–1234 |
| 1244년 | Paris | 루이 왕이 파리에서 큰 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함 | §106 (장 XXIV), part_02 L1533–1534 |
| 1244년 | Gaza | 가자 전투(1244). 페르시아 황제가 야파 백작 고티에를 끌고 와 팔을 꿰어 매달았고, 야파 성을 넘길 때까지 내리지 않겠다고 했다(줄 1737–1740). | 줄 1737–1740 (주석 줄 1742) |
| 1248년 ~ 1250년 | Damietta | 루이가 다미에타 앞에서 배를 떠나 누구보다 먼저 뛰어내려 상륙했다. 신하들은 배에 남으라고 권했다(§7). | §7 (줄 1636–1637) |
| 1248년 | Joinville | 조앵빌이 자기 성을 떠나 십자군 길에 오름 | §119–120 (장 XXVII), part_02 L1871–1878 |
| 1248년 | Auxonne | 오송(Auxonne)에서 짐을 배에 싣고 손강(Saône)을 따라 리옹까지 내려감. 리옹에서 론강을 타고 아를로 감 | §124 (장 XXVIII 앞), part_02 L1957–1963 |
| 1248년 | Roche-de-Marseille | 8월, 조앵빌 일행이 배에 올라 출발. 말을 먼저 배 안에 넣는 순서를 서술 | §125 (장 XXVIII), part_02 L1970–1971 |
| 1248년 | Chypre | 배가 산(육지)을 보지 못한 채 항해하다가 세 번째 토요일에 키프로스에 도착 | §129 (장 XXVIII 끝), part_02 L2064 |
| 1248년 ~ 1249년 | Nicosia | 니코시아에 있던 왕이 조앵빌을 불러 봉급을 주고 붙잡아 둠. 800리브르를 줌 | §136 (장 XXIX 끝 무렵), part_02 L2235–2237 |
| 1248년 ~ 1249년 | Baffe (Paphos) | 콘스탄티노플 황후가 키프로스의 바페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조앵빌이 나가 맞이함. 폭풍에 배 밧줄이 끊겨 배가 아크레로 떠내려감. 리마소(Limisso)로 데려감 | §137–138 (장 XXX), part_02 L2241–2249 |
| 1248년 ~ 1254년 | Aix-en-Provence | 루이 왕이 프로방스 백작령을 지나 엑상프로방스에 이르러, 막달라 마리아가 은둔했다는 바위 굴 아래 머묾 | 조각 줄 14–17 (§663) |
| 1249년 ~ 1250년 | Mansourah | 만수라에서 다미에타로 떠날 때 병이 깊어 갤리선으로 가라는 권유가 있었다. 루이는 이질과 열병 속에서 실신을 거듭했다(§9–10). | §9–10 (줄 1648–1649) |
| 1249년 | Égypte | 이집트 도착. 그 뒤 황후는 프랑스로 떠나며 동생 장 다크르(Jean d'Acre)를 데려가 몽포르 백작 부인과 결혼시킴 | §140 (장 XXXI), part_02 L2325–2332 |
| 1249년 | Chypre | 3월, 왕의 명령으로 배에 포도주와 식량을 다시 싣고, 왕이 떠날 때 함께 떠날 준비 | §141 (장 XXXII), part_02 L2435–2437 |
| 1249년 | Damiette | 십자군이 다미에타 해안에 내려 맞아 나온 사라센 기병을 물리침 | XXXIV장 56절 (l.133~138) |
| 1249년 | Damiette | 루이 왕이 배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해안 선두에 섬 — 다미에타 점령 시작 | XXXV장 62절 (l.260~266) |
| 1249년 | Damiette | 다미에타 점령은 하느님의 은총이나 굶겨서 얻은 것 — 옛 장 드브리엔 왕도 기근으로 취했다는 조앵빌의 평가 | XXXVI장 165절 (l.343~349) |
| 1249년 | 고티에 도트리슈 — 혼자 말을 몰고 투르크 쪽으로 나가다 낙마해 말에 깔려 죽음 | XXXVIII장 174절 (l.576~582) | |
| 1249년 | Babylone | 군대가 다미에타에서 바빌론(카이로) 쪽을 향해 떠남 — 아르투아 백작의 권고로 | XXXIX장 184절 (l.774~778) |
| 1249년 | 루이 왕이 강 가운데 둑길(chaussée)과 보루 두 개(chats-châteaux)를 세워 사라센 쪽으로 건너가려 함 | XLI장 192절 (l.1021~1027) | |
| 1249년 | 사라센 공격을 물리친 뒤 루이 왕이 진영 둘레에 호(fossé)를 파라고 명함 — 다미에타 강~렉시 강 사이 | XLI장 말 (l.1126~1132) | |
| 1249년 | 사라센 공성탑(chat)을 그리스 불(feu grégeois)로 태움 — 조앵빌 쪽이 야간 경계 면함 | XLIV장 말 (l.1483~1489) | |
| 1249년 | Damietta | 사라센 병사를 공성 기계 밖으로 몰아냄. 빼앗은 기계 곁으로 튀르크 기병 대군이 몰려와 조앵빌이 왕에게 구원을 청함(기사들은 상처로 갑옷도 못 입음) | part_04 L18 |
| 1249년 ~ 1250년 | Cairo | 술탄이 죽자 그 아들(25세, 영리하고 교활)이 오리엔트 영지에서 와 이집트에 도착. 아버지 측근들(시종장·대원수·원수)의 금 지팡이를 빼앗아 자기 쪽에 줌 | part_04 L788 |
| 1249년 ~ 1250년 | Damietta | 튀르크가 갤리선을 뭍으로 끌어 올려 나일 강으로 옮겨 놓아, 다미에타에서 오는 보급이 끊기고 굶주림이 닥침 | §292 (part_04 L845) |
| 1249년 | Damiette | 왕이 무장한 채 배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해안으로 달려가 사라센과 맞섰고, 부하들이 붙잡음 | part11 l.513~514 (네 가지 큰 일 첫째) |
| 1250년 ~ 1254년 | Acre | 루이가 형제들이 떠난 뒤 아크레에 4년 머물렀다. 조앵빌은 아크레가 점령되면 위험했을 것이라고 말한다(§11–12). | §11–12 (줄 1665–1666) |
| 1250년 | Mansourah | 맨수라 시가 좁은 골목에서 투르크가 들보를 던져 아르투아 백작·쿠시의 라울 등 기사 약 300명 사망 — 템플 기사 280명 포함 | XLV장 말 (l.1648~1656) |
| 1250년 | Mansourah | 루이 왕이 본군(corps de bataille)을 이끌고 와 사라센을 공격 — 부상한 조앵빌은 앙주 백작 등이 구함 | XLVII장 228절 (l.1843~1847) |
| 1250년 | Mansourah | 조앵빌이 다리를 지키며 공격을 막아냄 — 투르크가 뒤에서 피에르 드 누빌을 쳐 죽임 | XLIX장 239절 (l.2167~2173) |
| 1250년 | Mansourah | 저녁 무렵 궁수가 나서자 사라센이 물러나고, 조앵빌은 루이 왕 곁으로 돌아감 — 사라센 진영은 베두인이 약탈 | L장 243절 (l.2261~2266) |
| 1250년 | Al Mansurah | 전투 뒤 루이가 바로네들을 모아, 하느님이 두 번 은총을 주셨다고 말함 | §279 (part_04 L541) |
| 1250년 | Damietta | 사라센이 다미에타를 되찾기 위해 무엇을 내놓을지 물음. 왕의 형제나 백작 하나를 볼모로 두자는 안을 냈으나 사라센은 왕 본인을 담보로 원함 | §302 (part_04 L1033) |
| 1250년 | Al Mansurah | 진지 안에 괴혈병이 번져 잇몸에 죽은 살이 자라, 이발사들이 그것을 잘라냄 | §303 (part_04 L1094) |
| 1250년 | Fariskur | 사라센 갤리선과 배들이 왕이 탄 작은 배 가까이 다가와 둘러쌈. 왕이 사로잡힘 | §305 (part_04 L1219) |
| 1250년 | Al Mansurah | 새벽에 나일강을 건너던 프랑스군이 술탄의 갤리선이 있는 나루에서 교전. 사라센이 그리스 불을 쏘아 댐 | §314 (part_04 L1359) |
| 1250년 | Al Mansurah | 카렘프르낭 대전투에서 라울 드 와누가 발 뒤꿈치 힘줄이 끊겨 걷지 못함. 사라센 노기사가 목에 매고 갤리선 변소까지 날라 줌 | §325 (part_04 L1617) |
| 1250년 | Al Mansurah | 포로 기사들이 흙벽 두른 안뜰에 갇힘. 사라센이 한 명씩 끌어내 「개종하겠느냐」 묻고, 거부한 자는 목을 벰 | part_04 L1854 |
| 1250년 | Damietta | 술탄이 귀족들을 갤리선 네 척에 나눠 태워 다미에타로 보냄. 조앵빌도 그 배에 탐 | §344 (part_04 L2127) |
| 1250년 | Damietta | 사라센 아미랄들과 약조: 다미에타를 넘기면 왕과 귀족을 풀어 줌. 그러나 술탄은 평민(menu peuple)을 바빌론으로 보내고 일부를 죽여 약조를 어김 | §358 (part_04 L2376) |
| 1250년 | Damietta | 다미에타가 넘어가면 왕과 귀인들을 풀어 준다는 조건이 오간다(줄 108–109). | 줄 108–109 |
| 1250년 | Damietta | 다미에타의 군사는 배로 옮겨 타고, 병자만 성에 남겨 두었다(줄 181–182). | 줄 181–182 |
| 1250년 | Babylon (Egypt) | 이집트 갤리선 지휘관이 턱을 가리키며 신호하자 배들이 닻을 올려 조앵빌 일행을 바빌론 쪽으로 한 리외 뒤로 밀어냈다(줄 322–323). | 줄 322–323 |
| 1250년 | Acre | 왕비가 아크레로 와서 왕을 기다린다(줄 914–915). | 줄 914–915 |
| 1250년 | Mansura | 왕이 동생 아르투아 백작의 죽음을 애통해한다(줄 999–1000). | 줄 999–1000 |
| 1250년 ~ 1252년 | Acre | 조앵빌이 키프로스로 데려간 기사 이천팔백 명 가운데 아크레에는 백 명도 남지 않았다며 왕에게 귀국을 권한다(줄 1448–1450). | 줄 1448–1450 |
| 1250년 ~ 1254년 | Damascus | 다마스쿠스 술탄은 이집트 아미르들이 깬 휴전을 바로잡을 때까지 왕을 돕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했다(줄 2490–2491). | 줄 2490–2491 |
| 1250년 ~ 1252년 | Gaza | 이집트 아미르들이 가자에 와서 예루살렘 왕국을 왕에게 넘기기로 서약했다. 왕과 귀족들은 다마스 술탄을 상대로 한 동맹을 맹세했다(줄 1318–1322). | 줄 1318–1322 |
| 1250년 ~ 1252년 | Gaza | 다마스 술탄이 가자의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들어가 이집트 아미르들과 싸웠다. 패한 술탄은 머리와 손을 다쳐 가자로 돌아갔고, 아미르들과 화약을 맺었다(줄 1858–1864). | 줄 1858–1864 |
| 1250년 | Mansurah | 템플 기사단·에우 백작·구호기사단 등 바론들이 왕의 공격대를 성과 도시 사이로 보내기로 합의했다 | 줄 125–130 |
| 1250년 | Mansurah | 사라센 군이 무너져 도시를 떠나고, 우리 군이 다툼 없이 도시를 넘겨받았다 | 줄 253–255 |
| 1250년 | Mansurah | 독일 기사들이 퇴각하는 중 조앵빌의 기사 장 드 뷔시가 목에 쇠뇌 화살을 맞고 죽었다 | 줄 339–341 |
| 1250년 | 포로 울타리 안에서 신앙 부인을 강요함 — 부인하지 않는 자는 죽이고, 부인한 자는 살려 둠 | part_09 줄 479-482 (§808) | |
| 1250년 | 술탄 자문회의가 석방 대가로 템플·병원 기사단 성을 내놓으라고 함 — 백작이 성주들이 성인 앞에 맹세했다며 거절 | part_09 줄 547-554 (§§809-810) | |
| 1250년 | 백작이 가둔 자 죽이기는 쉬운 일이라고 맞받음 — 사절들은 칼잡이를 데려오겠다며 떠남 | part_09 줄 556-559 (§811) | |
| 1250년 | 사절이 떠난 뒤 젊은 사라센 무리가 칼을 빼 들고 포로 울타리 안으로 들어옴 — 조앵빌은 죽이러 온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 part_09 줄 561-564 (§812) | |
| 1250년 | 자문회의가 돌아와 포로 넷을 왕에게 보내라고 함 — 조앵빌은 왕 혼자서 석방을 협상했다고 씀 | part_09 줄 637-643 (§815) | |
| 1250년 | Mansoura | 사라센이 동생을 풀어주기 전에 몸값 전액을 요구 — 신하들이 돈을 넘기지 말라 했으나 왕은 약속대로 치르겠다고 답함 | part11 l.302~310 (EXTRAITS TEXTUELS, 판본 B·A) |
| 1250년 | Mansoura | 왕이 몸값을 다 치르기 전엔 강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돈을 낸 뒤 갤리선으로 강을 떠남 — 동생 포아티에 백작은 다른 배에 있었음 | part11 l.382~390, l.445 |
| 1250년 | Mansoura | 왕이 붙잡힘 — 발췌는 남을 위한 사랑 때문이었다고만 씀 | part11 l.522~529 (네 가지 큰 일 둘째) |
| 1250년 ~ 1254년 | Acre | 왕이 프랑스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아크레에 머무름 — 발췌는 4년이라고 씀; 그 사이 기독교 백성을 구하려 함 | part11 l.579~583 (네 가지 큰 일 셋째) |
| 1251년 ~ 1252년 | Caesarea (Palestine) | 조앵빌이 아크레에서 신앙고백(Credo)의 그림/글을 처음 만들게 함 — 왕의 형제들이 아크레에 온 뒤, 왕이 세사레아 성벽 보강에 나서기 전의 일(시점 표지) | 조각 줄 2455–2456 |
| 1252년 ~ 1254년 | Cyprus | 귀국 항해 중 배가 키프로스 앞에서 크게 부딪혀 용골 3토아즈가 떨어져 나갔다(§13). | §13 (줄 1739–1740) |
| 1252년 ~ 1254년 | Cyprus | 선장들이 배를 갈아타라고 권했으나 루이는 800여 명을 위험에 둘 수 없다며 배에 남았다(§14–15). | §14–15 (줄 1756 근처) |
| 1252년 ~ 1254년 | Cyprus | 올리비에 드 테름이 루이를 떠나 키프로스에 남았고, 조앵빌은 그 뒤 1년 반 동안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16). | §16 (줄 1767 근처) |
| 1252년 ~ 1254년 | Acre | 왕이 머물면 나라가 지켜진다는 말과, 떠나면 예루살렘 왕국이 무너진다는 여론을 옮긴다(줄 1780–1782). | 줄 1780–1782 |
| 1252년 | Jaffa | 루이 왕이 카이사레아를 떠나 야파로 향했다. 야파 백작은 왕이 온다는 것을 알았다(줄 1328–1329). | 줄 1328–1335 |
| 1252년 | Sidon | 사예트(시돈)에서 왕이 어머니 죽음 소식을 듣고 이틀 동안 말을 걸 수 없을 만큼 슬퍼했다 | 줄 981–985 |
| 1253년 | Acre | 왕이 사예트를 떠나 아수르를 거쳐 사순절 초에 아크레에 도착했다 | 줄 1275–1276 |
| 1254년 | Paris | 조앵빌이 아크레를 떠나 파리로 가던 길에 가난한 이들이 몰려온 장면(줄 2126–2127). | 줄 2126–2127 |
| 1254년 | 왕이 전국 관리(prévôt·bailli·sergent)에게 선서를 시키고, 선물·뇌물·부당 수탈을 금하는 총칙을 세움 | 조각 줄 757–762 (§693), 이어 줄 766–884 | |
| 1254년 | Chypre | 귀환 배가 크게 부딪혀 상함 — 선원들이 다른 배로 옮기라 했으나 왕은 키프로스에 800명을 남기지 않겠다며 거절 | part11 l.590~601 (네 가지 큰 일 넷째) |
| 1258년 ~ 1259년 | 영국 왕이 왕비·자식과 함께 프랑스에 와 평화를 협상함 — 왕의 측근들은 영국 왕에게 많은 땅을 넘기는 데 반대 | 조각 줄 398–404 (§678) | |
| 1270년 | Tunis | 루이가 십자가를 진 채 튀니스에서 죽었다고 조앵빌이 말한다(§5). | §5 (줄 1565–1566) |
| 1270년 | Tunis | 왕의 원정대가 튀니스 앞, 카르타고 성 쪽에 상륙함 | 조각 줄 1688–1692 (§738) |
| 1270년 | Tunis | 왕이 이질에 걸리고, 맏아들 필리프도 학질과 이질에 걸림 | 조각 줄 1692–1694 (§738) |
| 1270년 | Tunis | 병이 깊어진 왕이 아들 필리프에게 가르침을 남기고 성사를 청해 받음 | 조각 줄 1943–1948 (CXLVI, §755) |
원문: Jean sire de Joinville, Histoire de saint Louis (19세기 판). archive.org OCR(djvu.txt) 그대로, 글자 교정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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