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각(諸葛恪) — 정사 삼국지 기준 생애·이동 경로·능력치 근거

오출생 203년사망 253년기록 연도 2해

생몰

출생 203년 — 가화 3년(234)에 32세로 단양태수가 된 기록에서 역산

사망 253년 — 건흥 2년 10월 손준이 궁중 연회에서 습격해 죽임

연도별 위치

연도지명직책근거
245년무창대장군기록
253년건업태부기록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연도별 직책·소속

연도소속직책근거
203~233년기타·재야(제갈근의 장남, 태자 손등의 빈우)불명
234~244년오무월장군·단양태수불명
245년오대장군기록
246~251년오대장군불명
252년오태부불명
253년오태부기록

나온 사건·전투

234년 · 무월장군·단양태수

손권에게 3년이면 단양 산월에서 갑사 4만을 얻을 수 있다고 호언하고 무월장군·단양태수가 되어, 곡식을 베어 산민을 굶겨 나오게 한다.

정사 제갈각전: 단양은 산이 험하고 백성이 과감해 앞서 병을 보내도 외현 평민만 얻었는데, 제갈각이 3년이면 갑사 4만을 얻는다고 청했다. 부친 제갈근은 "각이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키지 못하면 크게 멸족시킬 것"이라고 탄식했다. 제갈각은 손권에게서 무월장군·단양태수를 받았고 32세였다. 예하 장수에게 요새를 지키며 곡식이 익을 때 베어 없애 산민을 굶겨 나오게 해 1년 만에 규정 인원을 채웠다. 가화 3년(234).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64 「權拜恪撫越將軍,領丹楊太守」

245년 · 대장군

육손이 죽자 대장군·가절이 되어 무창에 주둔하고 형주 일을 맡는다.

정사 제갈각전: 적오 연간 사마의가 제갈각을 노린다는 소문에 시상으로 옮겨 있었고, 육손이 죽자 대장군·가절로 무창에 주둔하며 육손을 대신해 형주 일을 맡았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64 「恪遷大將軍,假節,駐武昌」

252년 · 태부 · 대승

손권 사후 태부가 되어 동흥에 둑을 쌓고 쳐 온 위군 7만을 정봉 등의 선봉으로 크게 깬다.

정사 제갈각전: 손권이 죽고 태부가 된 제갈각은 건흥 원년 10월 동흥에서 큰 둑을 다시 쌓고 양쪽 산에 두 성을 쌓아 전단·유략이 지키게 했다. 위가 호준·제갈탄 등 7만으로 쳐 오자 제갈각은 4만으로 밤낮 달려가 유찬·여거·당자·정봉을 전부로 삼았고, 위 장수들이 술자리를 벌이고 방비를 소홀히 하는 틈에 북을 쳐 뛰어올라 크게 깼다. 수만 명이 죽었고 환가 등이 전사했다. 양도후·형양주목.

연의: 연의 108회 — 연의 108회에 같은 인물·사건이 나온다.

출전: 三國志 卷64 「更作大堤,左右結山俠築兩城」

253년 · 태부

이듬해 20만을 징발해 신성을 포위하고 병사 다수를 병으로 잃은 뒤 건업에 돌아와 손준의 연회에서 죽는다.

정사 제갈각전: 대신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주군 20만을 발해 회남을 쳤는데 신성을 몇 달 공격하고도 함락하지 못했고 사졸이 더위에 물을 마셔 설사와 부종으로 병자가 반이 넘었다. 제갈각은 성이 빠지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해 분노를 얼굴에 드러냈고, 병이 많다고 보고하는 관리를 베려 하자 아무도 말하지 못했다. 8월 철군 뒤 건업에서 엄하게 다스리다가 손준이 손량과 꾸민 연회에 불려가 "조서가 있다, 제갈각을 잡아라"라는 소리와 함께 칼에 맞아 죽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64 「攻守連月,城不拔」

능력치와 근거

항목전성기 수치근거
통솔78건흥 원년 동흥에서 제방을 쌓고 위군 7만을 유인해 대파했다(제갈각전).
무력50무력 기록은 뚜렷하지 않다.
지력88단양 산월은 요새를 지키며 곡식이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베어 굶겨 항복시키는 방식으로 3년에 갑사 4만을 얻는다고 호언하고 실행했다(제갈각전).
정치70단양태수로서 정책으로 산월을 나오게 했으나 신성 포위에서 연이은 실책으로 사졸 다수를 잃었다(제갈각전).
매력50동흥 승리 뒤 경적하여 대군을 일으켜 사람들의 마음을 잃었고 손준에게 모함을 받았다(제갈각전).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제갈각의 이동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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