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후기: 정사 사료. 다루는 해 792년 ~ 833년, 사건 108건을 해 순서로 정리했습니다. 원문 라이선스와 출처 포함.
| 등급 | 정사 |
|---|---|
| 시점 | 내부 시점 |
| 다루는 해 | 792년 ~ 833년 |
| 사건 수 | 사건 108건 · 지도에 놓은 95건 |
| 저자 | 藤原緒嗣·藤原冬嗣 등 칙찬 |
| 원제 | 日本後紀 |
지역 분포: 일본 95 · 중국 13
| 해 | 장소 | 사건 | 원문 위치 |
|---|---|---|---|
| 792년 | 陸奥国 | 陸奥국이 보고함 — 斯波村 蝦夷 胆沢公阿奴志가 사신을 보내 귀순을 청하나 伊治村 포로들이 길을 막는다고 호소함. 조정은 이후 夷 사신에게 관례의 하사품을 주지 말라고 지시 | 日本後紀 卷1 |
| 792년 | 伊勢国 | 失火로 소실된 伊勢国 天照大神宮을 다시 짓도록 함 | 日本後紀 卷1 |
| 792년 | 陸奥国 | 조정이 夷爾散南公 阿破蘇의 입조 의사를 가상히 여겨 경유 국에서 장건한 군사 300기를 뽑아 국경에서 맞이하며 위세를 보이라고 명함 | 日本後紀 卷1 |
| 792년 | 長岡京 | 朝堂院에서 陸奥 蝦夷 阿波蘇·隠賀와 포수 荒嶋에게 연회를 베풀고 阿波蘇·隠賀에게 제1등 관작을 줌 | 日本後紀 卷1 |
| 793년 | 平安京 | 大納言 藤原小黒麻呂·左大弁 紀古佐美 등을 보내 山背国 葛野郡 宇太村 땅을 살피게 함 — 천도를 위함(新宮 조영 시작) | 日本後紀 卷2 |
| 793년 | 平安京 | 參議 壱志濃王 등을 보내 賀茂大神에게 천도를 고함 | 日本後紀 卷2 |
| 793년 | 平安京 | 5위 이상·諸司 主典 이상에게 役夫를 내게 하여 새 서울의 宮城을 쌓게 함 | 日本後紀 卷2 |
| 793년 | 平安京 | 菅野真道·藤原葛野麻呂 등을 보내 새 서울의 택지를 나누어 줌 | 日本後紀 卷2 |
| 794년 | 長岡京 | 정월 초하루 조하를 폐함(宮殿을 막 헐기 시작함). 같은 날 征夷大将軍 大伴弟麻呂에게 節刀를 내림 | 日本後紀 卷2 |
| 794년 | 陸奥国 | 副将軍 坂上田村麻呂 이하가 蝦夷를 침 | 日本後紀 卷2 |
| 794년 | 陸奥国 | 征夷将軍 大伴弟麻呂가 보고함 — 참수 457급, 포로 150명, 말 85필, 불태운 마을 75곳 | 日本後紀 卷3 |
| 794년 | 平安京 | 詔로 山背国을 山城国으로 고치고 새 서울을 平安京이라 부름(近江 古津은 大津으로 개칭). 평안경 정도 | 日本後紀 卷3 |
| 795년 | 吉弥侯部真麻呂 부자를 살해한 俘囚 大伴部阿■良 등의 처자·친족 66인을 日向国으로 옮김 | 日本後紀 卷3 | |
| 795년 | 出羽国 | 出羽국이 보고함 — 渤海使 定琳 등 68인이 蝦夷 땅 志理波村에 표착해 약탈당함. 越後国으로 옮겨 관례대로 공급하라고 명함 | 日本後紀 卷4 |
| 796년 | 平安京 | 渤海국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침 — 왕이 선왕 서거를 알리는 啓를 올림 | 日本後紀 卷4 |
| 796년 | 御長広岳 등이 渤海에서 돌아와 渤海王의 啓를 전함 — 呂定琳 등의 생환에 사의를 표하고 교린을 청함 | 日本後紀 卷5 | |
| 796년 | 陸奥国 | 相模·武蔵 등 8국의 백성 9000인을 陸奥国 伊治城에 옮겨 둠 | 日本後紀 卷5 |
| 797년 | 平安京 | 지진과 폭풍 — 좌우 京 坊門과 민가가 많이 쓰러짐 | 日本後紀 卷6 |
| 797년 | 陸奥国 | 従四位下 坂上田村麻呂를 征夷大将軍으로 삼음(副将軍 등 딸림) | 日本後紀 卷6 |
| 798년 | 遣渤海使 内蔵賀茂麻呂가 하직하자 渤海王에게 보내는 璽書를 내림 | 日本後紀 卷7 | |
| 798년 | 平安京 | 귀화한 唐人 嵩山忌寸道光 등이 가난하니 형편에 따라 벼를 하사하라고 명함 | 日本後紀 卷7 |
| 799년 | 平安京 | 豊楽院이 덜 되어 대극전 앞에 임시 전각을 꾸려 천황이 임어하고 渤海使 大昌泰 등과 연회함 | 日本後紀 卷8 |
| 799년 | 隠岐国 | 앞서 渤海에 갔던 内蔵賀茂麻呂 등이 귀국 길에 밤바다에서 불빛을 따라 隠岐国 智夫郡에 닿았다고 보고하며 그 곳 신에게 폐백을 청함 전승 | 日本後紀 卷8 |
| 799년 | 三河国 | 작은 배를 탄 한 사람이 参河国에 표착함 — 唐人들이 崑崙人이라 하고 綿種(목화씨로 보이는 것)을 지님. 川原寺에 살게 함 | 日本後紀 卷8 |
| 799년 | 滋野船代 등이 渤海에서 돌아옴 — 渤海王 啓가 사신 往還을 半紀(6년)로 줄여 달라는 청이 받아들여진 데 사의를 표함 | 日本後紀 卷8 | |
| 800년 | 駿河国 | 駿河国이 보고함 — 3월 14일부터 4월 18일까지 富士山 꼭대기가 스스로 타 낮에는 연기로 어둡고 밤에는 불빛이 하늘을 비추며 우레 같은 소리와 재가 비처럼 내림 | 日本後紀 卷9 |
| 800년 | 陸奥国 | 征夷大将軍 坂上田村麻呂를 보내 諸国의 夷俘를 점검하게 함(検校) | 日本後紀 卷9 |
| 801년 | 藤原葛野麻呂를 遣唐大使, 石川道益을 副使로 삼음 | 日本後紀 卷10 | |
| 801년 | 陸奥国 | 征夷大将軍 坂上田村麻呂 등이 보고함 — 夷賊을 토벌해 복속시킴(원문 「云々」로 생략) | 日本後紀 卷10 |
| 801년 | 陸奥国 | 詔 — 陸奥 蝦夷가 대대로 변경을 침범해 백성을 해쳐, 田村麻呂 등을 보내 평정함. 田村麻呂를 従三位로 올림 | 日本後紀 卷10 |
| 802년 | 胆沢城 | 官軍의 토벌로 땅을 넓혀, 駿河·甲斐·相模·武蔵·上総·下総·常陸·信濃·上野·下野의 浪人 4000인을 陸奥国 胆沢城에 배치하라고 명함 | 日本後紀 卷10 |
| 802년 | 胆沢城 | 造胆沢城使 田村麻呂가 보고함 — 夷 大墓公 阿弖利為·盤具公 母礼가 종족 500여 인을 이끌고 항복함 | 日本後紀 卷10 |
| 802년 | 胆沢城 | 造陸奥国胆沢城使 田村麻呂가 大墓公 두 사람을 데리고 입경함 | 日本後紀 卷10 |
| 802년 | 河内国 | 大墓公 阿弖利為·盤具公 母礼를 河内国 植山에서 참수함 — 장군들은 돌려보내 그 무리를 부르게 하자고 했으나 공경이 「호랑이를 길러 화를 남기는 것」이라며 반대함 | 日本後紀 卷10 |
| 803년 | 遣唐大使 藤原葛野麻呂·副使 石川道益 등이 하직하고 節刀를 받음 | 日本後紀 卷11 | |
| 803년 | 難波津 | 葛野麻呂 보고 — 難波津에서 승선해 16일 출발했으나 폭풍우로 배가 부서지고 明経請益 豊村家永이 물에 빠져 행방불명, 익사자가 헤아릴 수 없음 | 日本後紀 卷11 |
| 804년 | 陸奥国 | 武蔵·上総·下総·常陸·上野·下野·陸奥에서 糒 14315斛, 米 9685斛을 陸奥国 小田郡 中山柵으로 운송 — 蝦夷 정벌을 위함 | 日本後紀 卷12 |
| 804년 | 陸奥国 | 坂上田村麻呂를 다시 征夷大将軍으로 삼고 百済王教雲·佐伯社屋·道嶋御楯을 副로 삼음. 軍監 8·軍曹 24 | 日本後紀 卷12 |
| 804년 | 平安京 | 폭우와 큰바람 — 중원 서쪽 누각이 넘어지고 神泉苑 좌우 누각이 허물어짐. 천황이 「짐에게 불리한가」 탄식함 | 日本後紀 卷12 |
| 804년 | 兵部少丞 大伴岑万里를 新羅에 보냄 — 7월 초 입해한 遣唐使 4척 중 2척이 바람에 되돌아오고 2척은 행방 불명이라, 新羅에 표착했을지 찾게 함 | 日本後紀 卷12 | |
| 805년 | 対馬国 | 遣唐使 제1선이 對馬嶋 下縣郡에 닿음. 大使 葛野麻呂 보고 — 작년 7월 6일 肥前국 松浦郡 田浦에서 출범, 제3·제4선은 연락이 끊김, 8월 10일 福州 長溪縣 赤岸鎭에 닿음 | 日本後紀 卷12 |
| 805년 | 松浦 | 遣唐使 제2선 判官 菅原清公이 肥前国 松浦郡 鹿嶋에 닿아 역마로 상주함 | 日本後紀 卷12 |
| 805년 | 松浦 | 大宰府 보고 — 遣唐使 제3선이 松浦郡 庇良嶋에서 출범하자마자 남풍을 만나 외딴 섬에 표착, 배가 바위 사이에서 침수·표류함. 조정은 선원들이 공무를 돌보지 않았다며 문책을 명함 | 日本後紀 卷13 |
| 805년 | 平安京 | 入唐求法僧 最澄을 전각으로 불러 悔過讀經을 하게 함. 最澄이 唐나라 불상을 바침 | 日本後紀 卷13 |
| 806년 | 平安京 | 山城国 葛野郡 宇太野를 山陵 터로 삼음. 상을 입어 백관이 소복을 입음. 서북쪽 두 산에 불이 일어남 | 日本後紀 卷13 |
| 806년 | 平安京 | 桓武天皇을 山城国 紀伊郡 柏原山陵에 장사함(諱 山部, 天宗高紹天皇의 장자. 前史가 빠져 일생을 기록) | 日本後紀 卷13 |
| 806년 | 平安京 | 平城天皇이 大極殿에서 즉위하고 大同으로 개원함 — 사관은 즉위 다음 해를 넘기지 않은 개원은 예에 어긋난다고 평함 | 日本後紀 卷14 |
| 807년 | 大宰府 | 大唐에서 받은 綵幣를 香椎宮에 바치도록 사신을 보냄(遣唐使 귀환의 보답) | 日本後紀 卷15 |
| 807년 | 平安京 | 蔭子 藤原宗成가 中務卿 伊予親王에게 불궤를 부추기자, 大納言 藤原雄友가 듣고 右大臣 내마려에게 알림. 親王이 먼저 宗成의 사주를 아뢰어 宗成이 左近府에 갇힘(伊予親王 사건의 발단) | 日本後紀 卷16 |
| 808년 | 平安京 | 疫癘로 사망자가 많아 경중 해골을 거두어 묻고, 諸大寺·畿内七道 諸国에서 大般若経을 읽게 하며 병자에게 쌀·소금을 줌 | 日本後紀 卷16 |
| 808년 | 平安京 | 疫病 때문에 말 활쏘기를 멈춤. 大同元年 홍수 피해와 작년 이래 疫病 유행으로 쓰러진 자가 많아 피해 7분 이상 호의 미납 正税를 면제함 | 日本後紀 卷17 |
| 809년 | 平安京 | 平城天皇이 풍병으로 정사를 돌보기 어려워 皇大弟에게 양위한다는 詔를 내림 | 日本後紀 卷17 |
| 809년 | 平安京 | 皇太弟(嵯峨天皇)가 禅位를 받아 大極殿에서 즉위함 | 日本後紀 卷18 |
| 809년 | 平城京 | 太上天皇이 水路로 쌍선을 타고 平城으로 행차함. 궁전이 아직 되지 않아 故 右大臣 大中臣清麻呂 집에 임시 거처함 | 日本後紀 卷18 |
| 809년 | 平城京 | 畿内 諸国에서 工匠과 役夫 2500인을 고용해 平城宮을 짓게 함 | 日本後紀 卷18 |
| 810년 | 平城京 | 太上天皇의 명으로 平城으로 천도하려 함 — 田村麻呂·藤原冬嗣·紀田上을 造宮使로 삼음(藥子の変의 시작) | 日本後紀 卷20 |
| 810년 | 平城京 | 太上天皇이 大和国 添上郡 越田村에 이르러 앞길이 갑병으로 막힌 것을 알고 되돌아와 剃髮入道함. 藤原薬子는 자살함 | 日本後紀 卷20 |
| 810년 | 越前国 | 越前介 阿倍清継·権少掾 百済王愛筌 등이 太上天皇이 伊勢으로 행차한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호응, 새 介 登美藤津를 사로잡음. 조사에 죄를 인정함 | 日本後紀 卷20 |
| 810년 | 平安京 | 渤海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침 — 王이 先帝(桓武) 붕어와 天皇 즉위를 위로·경하하는 啓를 올림 | 日本後紀 卷20 |
| 810년 | 陸奥국 보고 — 渡嶋의 狄 200여 인이 氣仙郡에 와 닿았으나 管轄 밖이라 돌려보내려 하자 겨울이라 바다를 건너기 어렵다며 봄까지 머물기를 청함. 허락하고 의량을 줌 | 日本後紀 卷20 | |
| 811년 | 平安京 | 渤海使 高南容이 돌아감 — 渤海王에게 보내는 書를 내려 선린을 칭찬하고 선박을 바꾸어 副使가 호송하게 함 | 日本後紀 卷21 |
| 811년 | 陸奥国 | 文室綿麻呂를 征夷将軍, 大伴今人·佐伯耳麻呂·坂上鷹養을 副로 삼음 | 日本後紀 卷21 |
| 811년 | 平安京 | 大納言 坂上田村麻呂가 粟田 별업에서 향년 54세로 薨 — 延暦23年 征夷大将軍에 올라 공을 세웠다고 기록 | 日本後紀 卷21 |
| 811년 | 出羽国 | 将軍에게 내린 勅 — 俘軍 1000인을 吉弥侯部於夜志閇 등에게 맡겨 弊伊村을 습격하게 하고, 陸奥·出羽 두 나라 俘軍 각 1000인을 8·9월 사이에 좌우로 펼치도록 평의해 상주하라 함 | 日本後紀 卷21 |
| 811년 | 大宰府 | 大宰府 보고 — 新羅人 金巴兄·金乘弟·金小巴 3인이 쌀 운반 중 해적을 만나 동료가 몰사했다 하며 귀국을 원하여 동선으로 돌려보내기를 청함. 허락함 | 日本後紀 卷21 |
| 811년 | 林東人 등이 渤海에서 돌아와 보고 — 국왕의 啓가 상례에 맞지 않아 받지 않고 돌아왔고, 録事 上毛野嗣益이 탄 제2선은 서로 떨어져 행방을 모름 | 日本後紀 卷21 | |
| 811년 | 陸奥国 | 将軍 보고에 응한 勅 — 참획이 적지 않고 귀항자가 많으니 蝦夷는 中国에 이주시키고 俘囚는 현지에 안치하라 함. 새로 잡은 夷도 상경시키되 강장자는 걷게 하고 약자는 말을 줌 | 日本後紀 卷21 |
| 811년 | 陸奥国 | 征夷将軍 文室綿麻呂 보고 — 官軍이 일거에 적을 남김없이 평정하였으니 鎭兵을 줄이고, 志波城은 강가에 있어 수해가 잦아 옮겨야 한다고 청함. 寶亀5년 이래 38년의 변경 분쟁을 말함 | 日本後紀 卷21 |
| 812년 | 対馬国 | 対馬嶋 보고 — 新羅船 3척이 서해에 떠 一艘가 下縣郡 佐須浦에 닿음. 선원을 죽이고 4인을 잡음. 밤마다 新羅 쪽에 불빛이 보여 長門·石見·出雲에 요해를 지키도록 통보함 | 日本後紀 卷22 |
| 812년 | 平安京 | 神泉苑에 행행하여 꽃을 구경하며 문인에게 시를 짓게 함 — 花宴의 시작 | 日本後紀 卷22 |
| 812년 | 표류해 온 新羅人 清漢波 등을 원하는 대로 돌려보냄 | 日本後紀 卷22 | |
| 813년 | 肥前国 | 大宰府 보고 — 新羅人 110인이 5척으로 小近嶋에 와 토착민과 싸워 9인이 죽고 101인이 사로잡힘. 소환하여 귀화한 자는 관례대로, 원하는 자는 돌려보내라 함 | 日本後紀 卷23 |
| 814년 | 出雲国 | 夷 第一等 遠胆沢公 母志에게 外従五位下를 줌 — 出雲의 謀叛 俘를 토벌한 공 때문 | 日本後紀 卷23 |
| 814년 | 出雲国 | 出雲国 意宇·出雲·神門 3郡의 미납 16만 束을 면제 — 俘囚의 난이 있었기 때문 | 日本後紀 卷23 |
| 814년 | 博多 | 大宰府 보고 — 新羅人 辛波古知 등 26인이 筑前国 博多津에 표착해 풍화를 사모하여 왔다고 함 | 日本後紀 卷24 |
| 814년 | 胆沢城 | 陸奥국 보고 — 胆沢·徳丹 두 성은 국부에서 멀고 塞 밖에 외로이 있어 城下와 津輕 狄俘가 불측하니 糒·塩을 미리 비축해 두도록 청해 허락함 | 日本後紀 卷24 |
| 815년 | 平安京 | 5위 이상과 渤海使를 불러 연회하고 女樂을 연주함 | 日本後紀 卷24 |
| 815년 | 渤海使 王孝廉 등이 바다에서 큰 바람을 만나 되돌아왔으나 배가 부러져 다시 쓸 수 없음 | 日本後紀 卷24 | |
| 816년 | 平安京 | 渤海副使 高景秀 이하에게 여름옷을 주고 渤海王에게 보내는 書를 내림 — 작년 孝廉 귀로에 배가 부서지고 孝廉이 병으로 죽은 일을 알림 | 日本後紀 卷25 |
| 816년 | 平安京 | 밤의 큰바람이 羅城門을 쓰러뜨림. 경중과 여러 나라도 피해가 큼 | 日本後紀 卷25 |
| 816년 | 上総国 | 公卿 보고 — 上総국 夷隅郡의 관물(穎 57만여 속)과 정창 60동이 소실됨. 税長이 달아나 자살했고, 신임 守·介에게 보상을 지움 | 日本後紀 卷25 |
| 816년 | 大宰府 | 大宰府 보고 — 新羅人 清石珍 등 180인이 귀화함. 때 옷과 노자를 주어 배로 입경시키라 함 | 日本後紀 卷25 |
| 817년 | 陸奥国 | 陸奥국 보고 — 반란한 俘 吉弥侯部於夜志閇 등 61인을 모두 붙잡음. 처자를 불러 모으기 위해 몸은 성 아래 머무르게 해 달라는 청을 허락함 | 日本後紀 卷26 |
| 818년 | 武蔵国 | 相模·武蔵·下総·常陸·上野·下野 등 국에 지진 — 산이 무너지고 골짜기가 메워지길 수 리, 압사한 백성이 헤아릴 수 없음. 8월에 사신을 보내 순찰·진휼함 | 日本後紀 卷27 |
| 819년 | 平安京 | 大唐 越州人 周光輪·言升則 등이 新羅人 배를 타고 와 唐 소식을 묻자, 元和 11년 圓州 節度使 李師道가 반란을 일으켜 50만 병을 거느렸고 天子가 諸道 병을 보내 토벌하나 이기지 못했다고 답함 | 日本後紀 卷27 |
| 819년 | 平安京 | 渤海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침 — 王 仁秀의 啓 | 日本後紀 卷27 |
| 820년 | 平安京 | 渤海王에게 보내는 書를 내림 — 앞 사신 感徳 등이 선박이 표류해 올 수 없어 배 한 척을 특별히 내려 보냈음을 적음 | 日本後紀 卷28 |
| 820년 | 駿河国 | 遠江·駿河에 배치되었던 新羅人 700인이 반란해 사람을 죽이고 집을 불태움. 두 나라 군이 이기지 못했고 伊豆국 곡식을 훔쳐 배로 출해하자 相模·武蔵 등 7국 군을 보내 추토해 모두 평정함 | 日本後紀 卷28 |
| 821년 | 讃岐国 | 讃岐국 보고 — 満濃池 제방 보수가 공은 크고 인력이 적어 끝나지 않으니, 이 지방 출신 僧 空海를 別当으로 삼기를 청함. 허락함 | 日本後紀 卷29 |
| 822년 | 平安京 | 豊楽殿에서 5위 이상과 蕃客을 연회함 — 渤海使 王文矩 등이 打毬를 하고 상으로 綿 200屯을 걺 | 日本後紀 卷30 |
| 822년 | 傳灯大法師 最澄이 향년 54세로 卒 — 延暦末 入唐해 台州에서 天台宗을 배워 돌아와 널리 폈다고 기록 | 日本後紀 卷30 | |
| 823년 | 平安京 | 嵯峨天皇이 冷然院으로 옮겨 皇太子에게 양위하겠다고 藤原冬嗣에게 말함. 冬嗣가 일제이태상황의 부담을 들어 만류하나 천황이 뜻을 굽히지 않음 | 日本後紀 卷30 |
| 823년 | 平安京 | 淳和天皇이 東宮에서 내리(內裏)로 옮기고, 先立 常世王이 固辞하여 正良親王을 皇太子로 세움 | 日本後紀 卷31 |
| 823년 | 加賀国 | 加賀국이 渤海 入覲使 101인의 도착을 보고함 | 日本後紀 卷31 |
| 824년 | 平安京 | 詔로 弘仁15年을 天長元年으로 개원함 | 日本後紀 卷32 |
| 824년 | 陸奥国 | 新羅人 辛良·金貴·賀良·水白 등 54인을 陸奥国에 안치하고 法에 따라 부역을 면하며 乗田으로 口分을 줌 | 日本後紀 卷32 |
| 824년 | 平安京 | 平城太上天皇을 楊柳陵에 장사함 — 사관은 도량이 깊으나 시기심이 많고 嗣位 초에 형제와 그 모자를 처벌한 일이 지나친 형벌이라 평함 | 日本後紀 卷32 |
| 825년 | 隠岐国 | 隠岐국이 역마로 상주함 — 渤海使 高承祖 등 103인이 도착함 | 日本後紀 卷33 |
| 826년 | 右大臣 藤原緒嗣가 아뢰기를, 天長元年 상표에 渤海 입조는 一紀(12년)로 정했는데 靈仙의 말을 빌려 기한을 어기니 되돌려 보내자고 하였으나 어떤 이는 천황 양위의 미담을 해외에 알려야 한다고 반론함 | 日本後紀 卷34 | |
| 827년 | 平安京 | 가뭄 때문에 少僧都 空海가 佛舎利를 內裏에 청해 예배·관욕하자 비가 내림 | 日本後紀 卷35 |
| 827년 | 平城京 | 지진 — 東大寺 盧舎那大仏을 굳게 하겠다는 뜻을 佐保山陵에 아룀(參議 藤原愛発 등을 보냄) | 日本後紀 卷35 |
| 828년 | 但馬国 | 但馬국이 역마로 보고함 — 渤海人 100여 인이 와 닿음(射礼 날의 기사) | 日本後紀 卷36 |
| 828년 | 平安京 | 큰비로 경중 길이 넘치고 하천이 터지며 산이 무너져 사람과 물건이 많이 떠내려감. 좌우 京에 진휼 사자를 보냄 | 日本後紀 卷36 |
| 829년 | 平安京 | 勅 — 諸国에 疫癘가 번져 백성이 일찍 죽으니 출가의 공덕으로 僧 100인을 득도시켜 재앙을 막게 함 | 日本後紀 卷37 |
| 830년 | 秋田城 | 出羽국 駅傳 보고 — 鎮秋田城 介 藤原行則의 첩에 의하면 辰刻에 큰 지진이 나 城廓·官舎·四天王寺 불상 등이 다 무너지고 百姓 15인이 압사, 부상 100여 인. 땅이 갈라지고 秋田河가 말라붙음 | 日本後紀 卷38 |
| 831년 | 平安京 | 지진(同日 無品 基良親王 薨, 大僧都 空海 上表 기사가 이어짐) | 日本後紀 卷39 |
| 832년 | 平安京 | 勅 — 작년 가을 흉작으로 諸国이 굶주리고 올해 疫旱이 이어지며 화재까지 나니 畿内七道 諸国에서 7일간 経王을 轉讀하게 함 | 日本後紀 卷40 |
| 833년 | 平安京 | 淳和天皇이 譲位를 위해 西院으로 遷御. 같은 날 巳刻 큰 지진(이어 皇太子에게 양위) | 日本後紀 卷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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