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한반도 · 좌표: 37.566, 126.978 · 사건 158건
| 해 | 사료 | 내용 |
|---|---|---|
| 1392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새 왕조가 도읍을 송도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한강변에 석축 성벽을 둘러 쌓음 |
| 1400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태종이 왕에게 직접 상소하는 함, 신문고(Sin-mun-to)를 설치 |
| 1585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히데요시가 보낸 사절 야스히로가 서울에서 조선 회답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자, 히데요시가 그와 그 일가를 죽이라고 명함 |
| 1586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요시토시 사절 일행이 서울에 와서, 조선이 요구한 해적 길잡이 역적 14명을 넘기고 조선 관리들이 참수함 |
| 1592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일본군이 부산 상륙 18일 만에 서울(한양)에 입성 |
| 1592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가토와 고니시 두 부대가 같은 날 서울에 들어감. 왕·궁정·군대는 사흘 전 도성을 떠나 저항 없음. |
| 1592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조선 왕이 도성을 떠나 북쪽으로 피난 시작(6월 9일). 식량 준비 없이 출발해 일행이 굶주림. |
| 1592년 | 라이 산요 「일본외사」 | 4월 浮田秀家 등이 군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감(文祿의 役 개시). |
| 1592년 | 라이 산요 「일본외사」 | 가토 기요마사 군이 5월 4일 한성 남대문에 닿았는데, 문을 지키던 군사의 기치가 모두 고니시 측 것이었다. |
| 1593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서울 대부분을 방화. 집·성문·다리·관청이 소실되고, 주민을 창끝으로 몰아냄. 쓸모 있는 장정만 남김. |
| 1593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일본군이 서울에서 철수하고 같은 날 명군 선발대가 입성. 일본군은 부산·동래 등 해안으로 퇴각. |
| 1627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후금군이 서울을 포위하고 공성 시작. 왕은 피를 피하려 조공을 보내고 화약을 맺음. |
| 1637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인조가 명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두 왕자를 인질로 주고, 해마다 조공 사신을 보내기로 한 조약 |
| 1647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표류한 일본인 일행이 청 황제의 호송으로 한양에 도착, 왕궁에서 대접받음 |
| 1653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네덜란드 일행이 한양에 입성 — 궁중에서 재주를 보이고 궁중 호위대에 배속됨 |
| 1657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네덜란드 일행이 한양을 떠나 말을 타고 남쪽 성곽 도시(Diu-siong, 위치 불명)로 이동 |
| 1658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왕 교체 — 앞 왕 퇴위 뒤 새 왕(Yen-chong) 즉위, 네덜란드인 처지도 바뀜 |
| 1707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청 강희제 측량 사절이 조선 왕궁에서 지도 원본을 받아 감 — 유럽 지도의 조선 지명 바탕 |
| 1784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승훈이 귀국해 한양에 도착. 가져온 책·십자가·그림을 이벽에게 보냄 |
| 1784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이벽이 승훈이 보낸 책을 받아 조용한 집을 빌려 틀어박혀 읽고 묵상 |
| 1784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1784년 4월 왕의 스승이 천주교를 겨냥한 첫 공식 문서를 냄 — 부모·친척에게 교인과 관계를 끊으라 함. 첫 희생자 토마스 김은 재판·고문 뒤 유배지에서 죽음. |
| 1785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형조판서 김화진이 김범우(토마스)를 잡아 배교를 강요. 권일신이 나서 같이 벌 받겠다고 하자 돌려보냄, 김범우는 계속 고문 |
| 1787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자체 교회 조직이 한양에서 성사를 집행. 정 도마(Jean T'soi)가 한양에 집을 빌려 성사를 맡음. 신자들이 모여 고백·영성체 |
| 178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윤유일(바오로)이 상인으로 변장해 한양에서 북경 행. 주교에게 질의 편지를 가지고 감 |
| 1790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윤유일이 사절을 따라 베이징을 떠나 귀국, 주교가 비단에 쓴 답서를 가지고 한양에 돌아옴 |
| 1790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1790년 9월 17일 한양을 떠난 연행 사절단 편에 교인 바오로가 실려 감 — 북경 주교에게 신앙·의식 질문을 담은 편지를 가져감. |
| 179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홍낙안이 재상 채제공(T'sai)에게 상소해 윤지충 극형을 청함. 같은 때 진산 현감에게도 체포를 재촉 |
| 179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권일신(François-Xavier Kouen Il-sin-i) 체포, 형조(tribunal des crimes)로 끌려가 고문. |
| 1794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1794년 6월 18일 신부 주문모를 한양에 데려온 교인 셋이 고문 끝에 옥중 사형, 시신은 한강에 버려짐. |
| 1794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1794년 12월 23일 중국인 신부 야고보 쭈가 압록강을 건너 한양에 도착, 바로 사목 시작. |
| 1795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지우 신부가 한양에 도착해 마티아스 최(Mathias T'soi)가 마련한 북쪽 집에 머묾. 부활절 미사를 처음 드림. |
| 1795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포졸이 신부 숨은 집을 덮침. 마티아스 최가 자기가 중국인 신부라며 나섬. 신부는 다른 교우 집으로 피함. 바오로·사바스도 같은 날 잡힘. |
| 1795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바오로(Paul loun)·사바스(Sabas Tsi)·마티아스(Mathias T'soi) 옥중 처형. 같은 밤 시신을 강에 던짐. |
| 1797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홍낙민(Luc Hong Nak-min-i)이 왕에게 올릴 보고를 모호하게 씀. 왕이 나무라자 오히려 박해를 청함. |
| 1798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황사영이 한양 애오개(Ai-o-kai) 쪽에 머물며 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기도서를 필사함 |
| 1800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1800년 국왕 Tieng-tsong-tai-oang이 등의 종기로 죽음 — 수술 없이 예법대로 죽었다고 원문이 서술 |
| 1800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정조 임금 승하 (재위 24년) |
| 1800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섭정 대비가 시파 고관 전원을 파면하고 노론 인사로 교체 |
| 180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섭정 이름으로 천주교 금지 교지 반포 — 다섯 집 연좌제, 「모두 죽여 씨를 남기지 말라」 |
| 180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교리 서적·편지가 든 상자가 발각되어 토마스 임 체포, 상자는 어거스틴 정 것으로 판정 |
| 180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고관 니 카환 등 네 명에게 체포령, 금부 감옥에 갇힘 |
| 180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앙브루아즈 권과 어거스틴 정이 체포됨 |
| 180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앙브루아즈 권이 옥중에서 죽음 (66세, 매 맞아 죽었다는 설과 옥고로 죽었다는 설) |
| 180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관리가 콜롬바 강의 집을 덮쳐 여자 노비까지 잡음 — 귀족 부녀를 잡은 첫 사례 |
| 180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여섯 교우가 서쪽 성문(Porte de l'Ouest) 밖에서 참수됨 |
| 180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P. 주(Tsiou) 신부가 스스로 나가 금부(Keum-pou) 감옥에 자수 |
| 180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신부를 숨겨 준 두 부인이 사약을 받음 |
| 180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여섯 교우가 사형 판결을 받아 처형됨 (샤를 정은 어거스틴의 아들) |
| 180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광주(Koang-tsiou) 출신 박 씨가 서울에서 참수됨 (동행 셋은 유배) |
| 180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P. 주 신부가 서울 근교 노들(No-teul, 미남도) 처형장에서 참수됨 |
| 180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김 씨(le-sam-i)의 밀고로 교리 우두머리 요한 최가 한밤중 체포됨 |
| 180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요사팟 김과 친척들이 1801년 6월 1일 도성 서쪽 작은 문 밖에서 참수됨 |
| 180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골롬바 강을 포함한 9명(여성 5명 포함)이 1801년 7월 3일 도성 서쪽 문 밖에서 참수됨 |
| 180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토마스 황(황심) 참수 후 사지 절단. 피에르 김도 함께 참수됨 |
| 180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황사영은 편지 작성자로 몰려 참수 후 사지 절단. 옥천희와 현계흠은 참수됨 |
| 180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조선 국왕 명의 서한이 청 가경제에게 보내짐. 사건을 보고하고 황사영 편지를 변명함 |
| 1801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1801년 순조 즉위 뒤 섭정 대왕대비가 노론 계열 신료를 세우고 전국 박해 교지를 냄 — 신분·나이·성별 무관하게 교인 체포. |
| 1801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1801년 5월 31일 Alexander Wang 참수 — 그가 비단에 쓴 북경 주교 앞 편지(유럽 6~7만 병력으로 조선 정복 요청)가 발각되어 조정이 음모로 판단. |
| 1802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사학 금지 교서(「Instruction contre la mauvaise religion」) 반포. 교리와 제사 폐지를 비판하고 금령을 굳힘 |
| 1802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찰스 니 등 여덟 명이 순교했고, 찰스 니는 22세로 참수됨. 같은 날 형장에서 처형 |
| 1802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1802년 1월 25일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는 새 교지 — 본문은 이것이 나라 안 모든 곳에 교리를 알린 꼴이 됐다고 적음. |
| 1827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1827년 음력 4월 21일 밤 한양에서 바오로 니(Paul Ni Tsiong-hoi)가 전주에서 온 관졸에게 체포됨 — 전주로 압송되어 그림·책 소지를 심문받음 |
| 1830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1830년, 대리청정하던 익종이 중병에 걸림. 그 전 귀양 중이던 Jean Tieng lak-iong을 불러 복권시켰으나 익종이 며칠 뒤 죽음. 장례 때 관이 불에 반쯤 탐. |
| 1832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1832년 음력 9월 10일 한밤중, 한양 관졸이 안드레 황의 집을 덮침. 안드레는 없었고 숙부 베드로 황과 함께 있던 사람들 포함 10명이 잡힘. 9명은 배교하고 풀려나거나 유배됨. |
| 1832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순조가 죽고 일곱~여덟 살 아들이 왕이 되어 김씨 왕대비가 섭정하는 체제가 들어섬 |
| 1833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1833년 6월(음력 5월 초), 베드로 황이 한양 옥에서 죽음. 약 여덟 달 옥살이, 70세 가까이에 고문 다섯 번. |
| 1833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중국인 사제 Pacifique(유 신부)가 조선에 들어가 있었고, 신앙 때문에 교우 9~11명이 투옥됨 |
| 1836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1836년 두 명의 배신자 고발로 서울에서 여자 교우 3명과 예비 신자 5명 체포. 안양(An-iang)에서도 마을 교우 체포 |
| 1836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1836년 말 교회 명령을 어긴 중국인 사제 유(Yu)가 쫓겨나 산시(Chang-si)로 돌아감 |
| 1836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1836년 말 교우 안내인들이 변문(Pien-men)에서 샤스탕 신부를 맞아 한양으로 데려옴 |
| 1837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임베르 주교, 국경에서 13일 걸어 12월 30일 저녁 수도에 도착, 마우반과 재회 |
| 1837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1837년 1월 17일 프랑스 신부 샤스탕이 상복 위장으로 Ai-chiu 세관을 지나 한양에서 모방과 합류. |
| 1838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1838년 성금요일, 수도 교외에서 함께 기도하던 과부 다섯 명 체포. 넷은 고문 뒤 풀려나 거지가 됨 |
| 1838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1838년 12월 19일 주교 임베르 입국 — 왕궁 가까이에 거처를 잡음. |
| 183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1839년 1월 16일 해질 무렵 포졸이 교우 세 집안(어른 열 명 남짓, 아이 일곱 포함) 체포. 기해박해의 시작 |
| 183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1839년 4월 7일 부활 주일 저녁 수도의 교회 주막 습격. 밀고자가 교우 쉰세 명 명단을 넘김. 수도 박해 본격화 |
| 183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1839년 4월 11일 여섯 여인(모녀 셋 포함)이 자진해 포졸 앞에 나섬 |
| 183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1839년 4월 19일 칙령 반포. 뿌리까지 뽑으라며 팔도 가택 수색, 다섯 집 연대 책임 명령 |
| 183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1839년 5월 9일 신자 서른다섯 명 두 번째 사형 판결. 조정이 거부하고 고문을 다시 하라고 명령 |
| 183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1839년 5월 24일 오후 3시 서소문 밖에서 교우 아홉 명 처형. 다미앙 남·아우구스티노 니·루치아 박 등 |
| 183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7월 7일 섭정 김씨 명의 교지 — 관리들의 교우 섬멸 태만을 꾸짖고 엄벌을 경고 |
| 183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서울 서소문 밖에서 여덟 명 참수 (음력 6월 10일) |
| 183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임베르 주교가 자수해 서울 성문에 도착, 붉은 포승으로 묶여 대역죄인 취급을 받음 |
| 183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옥중에서 바르바라 김(8/24)·안나 한(8/29) 고문 끝에 사망 |
| 183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서울 서소문 밖에서 교우 여섯 명 참수 (음력 7월 26일) |
| 183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교우촌 지도자 프랑수아 쵸이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 사망 (음력 8월 5일) |
| 183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9월 21일 새남터에서 임베르 주교·마우방·샤스탄 참수 (음력 8월 14일) |
| 183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폴 티엥·오귀스탱 니우 참수 (음력 8월 15일) |
| 183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샤를 조 포함 아홉 명 참수 — 서소문 밖 (음력 8월 19일) |
| 183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카트린 니·마들렌 쵸이·바르바라 쵸이 옥중 사망 (음력 8월 중) |
| 183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마들렌 니 참수 (음력 11월 24일, 추정 12월) |
| 183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필리프 쵸이·피에르 니우(13세) 옥중 교살 (음력 9월, 본문 25일/15일 불일치) |
| 183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서울 교리교사 아우구스티노 박이 체포됨 (음력 9월 말) |
| 183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음력 10월 18일 천주교 금압 교서가 반포됨 — 한문·한글판으로 전국에 배포, 신자 처형을 명시 |
| 183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서울 서쪽 작은 문 밖에서 피에르 최 등 일곱 명 처형 (음력 11월 24일) |
| 1839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1839년 1월 16일 박해 찬성파가 주도권을 잡고 8도 전역에 다섯 집 단위 수색 명령 — 기해박해의 시작. |
| 1839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1839년 9월 21일 프랑스 신부 셋(임베르·모방·샤스탕)을 한강변에서 참수 — 임베르는 8월 10일 자수. 시신 수습하던 교인도 붙잡힘. |
| 1840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마리 니 참수 (음력 12월 27일, 한 달 뒤) |
| 184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서울 옥에서 앙투안 김이 곤장 60대를 맞고 다음 날 밤 교살됨 (음력 윤3월 8일 기준) |
| 184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1841년 음력 2월, 필립 조(Philippe T'soi)의 은신처를 알 만한 교우들을 잡아 고문 |
| 184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음력 8월 10일, 앙드레 허와 프랑수아 쿠엔을 교살(옥중 6개월 여 뒤, 쿠엔 46세) |
| 184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음력 8월 14일, 아나스타지 Tsiang 교살(48세) |
| 184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음력 9월 23일, 필립 조(Philippe T'soi) 교살(51세) |
| 1845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1845년 김대건(André Kim)이 서울 관청의 공식 도면을 바탕으로 지도를 옮겨 그림 |
| 1845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1845년 3월 27일 안드레 김이 서울에서 쓴 편지 — 서울에 집을 사고 배를 마련, 페레올 주교 도착 준비 |
| 1845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1845년 1월 8일 김대건이 국경을 넘어 한양에 도착 — 동료 셋이 국경 밖 외진 곳에서 맞아 들임. |
| 1846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김대건 신부가 한양 근처 강가 처형장에서 참수됨 |
| 1846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왕이 판관에게 명해 남은 신자 여덟 명을 죽이게 함 — 찰스 히엔은 참수, 나머지 일곱은 감옥에서 교살 |
| 1846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찰스 히엔이 자기 집에서 체포됨 — 함께 여자 넷도 잡혀 옥에 갇힘 |
| 1846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조셉 님이 매를 맞아 죽도록 명이 떨어져 하루 종일 맞은 뒤 감옥에서 교살됨 |
| 1848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프랑스 배가 떠난 뒤 박해 소문이 커지자 페레올 주교가 한양 근교에서 사목을 멈추고 한동안 숨음 |
| 1848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1848년 말 토마스 최가 Ai-chiu 국경을 무사히 넘어 며칠 뒤 한양 도착 — 이후 종교서 인쇄·교인 1850년 1만 1천 명 기록. |
| 184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토마 쭤이가 변문에서 출발해 압록강 관문을 몰래 넘고 한양에 도착 — 마이스트르는 청 쪽에 남음 |
| 184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헌종이 23세로 죽고, 강화도에 유배돼 있던 18세 새 왕이 즉위. |
| 185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1851년 9월 다블뤼 신부가 길가에서 국왕 행차를 봄. 선왕 묘소 참배, 도성에서 약 네 리(lieues) 떨어진 곳. |
| 1852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상륙 뒤 주교 쪽에서 사람을 보내 마이스트르를 데려옴. 약 15일 뒤 세 신부가 재회. |
| 1853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페레올 주교가 서울 주교관에서 사망. 교우들은 이교도에게 죽음을 숨기려고 밤중에 시신을 옮김. |
| 1854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잔수 신부가 3월 수난주간에 입국. 조선 배로 옮겨 타 며칠 뒤 서울 도착. |
| 1857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다블뤼(Daveluy)가 주교로 서품됨(아코네스 주교). 3월 25일 밤 베르뇌 주교 집에서 비밀리에 거행, 이어 사흘 동안 첫 시노드 |
| 1857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페롱(Féron) 신부가 조선에 도착. 요동에서 기다리다 중국인 밀무역 배를 얻어 타고 조선 해안으로 들어와, 3월 31일 새벽 한양 베르뇌 주교 집에 닿음 |
| 1857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가을, 왕대비(국왕의 양모) 사망으로 국상. 이후 전 국왕의 왕비 쪽이 권력을 노려 현 국왕을 독살하려 했으나 실패, 두 주요 인물이 사사됨 |
| 1857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1857년 3월 31일 페론 신부가 조선 밀수선을 타고 들어와 한양에서 주교 베르뇌와 재회 — 같은 해 교인 1만 6,500명 기록. |
| 185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9월 말 콜레라가 한양을 덮침, 관청 보고로 전국 40만 명 이상 사망 |
| 1859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12월 말 서울에서 부유한 교우 체포로 시작된 박해, 지방 교우촌도 수색·약탈 |
| 186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철종 장인 김문근의 환갑잔치 — 지방에서 상납을 강요해 충청 지방장관이 잔치 후 파면됨 |
| 186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1861년 2월 연행사 귀환으로 베이징 함락·황제 피신 소식 확인 — 서울과 각지 공포 |
| 1861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프랑스 선교사 4명(랑드르·조안노·리델·칼레) 입국 — 체푸 출발, 메린토 섬에서 배 안 대기 후 밤중 한양 입성 |
| 1863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알렉시 우,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 받음 (1863) |
| 1864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철종 승하 (1864.1.15, 재위 14년). 이후 궁중 권력 교체의 시작 |
| 1864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조대비가 옥새를 빼앗아 열두 살 아이를 왕으로 세우고 섭정. 김씨 일파 실각 |
| 1864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1864년 1월 철종이 후사 없이 죽음 — 조대비가 옥새를 쥐고 대원군 아들 12세를 왕으로 세움, 대원군 9년 집권 시작. |
| 1866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신자 측 세 명이 섭정에게 「프랑스·영국과 동맹하면 러시아를 막을 수 있다」는 서한 제출. 섭정은 말없이 서한을 넓적다리 밑에 깔아 둠 |
| 1866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다블뤼 주교 1866.1.25 서울 도착, 베르뇌 주교 1.29 도착 (섭정 면담 준비 중 서울로 모임) |
| 1866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섭정이 서양 주교·신자 처형 칙령에 서명, 옛 금교법 적용 결정 |
| 1866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베르뇌 주교, 서울 자택에서 체포 (집 담을 넘어 침입, 밀고자 Ni Son-i 가 사다리 제공). 같은 날 신자 6명도 체포 |
| 1866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브레트뉴리에르 신부가 머물던 서울 신자 집(교리교사 마르코 팅) 포위·연금 (25일), 26일 법정 연행. 신부는 「나는 영혼을 구하러 왔다, 기꺼이 죽겠다」 답변 |
| 1866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병든 니 마티외가 정 베드로 집에서 굶어 죽음 (서울) |
| 1866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베르뇌 주교 처형 (3월 8일). 다블뤼가 같은 날 교구장 직을 이어받음 |
| 1866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뿌르티에·프티니콜라 처형. 마르크 티엥·알렉시 우도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처형 |
| 1866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김계호 토마스·바오로 김·니, 새남터에서 처형 (9월 8일 또는 10일) |
| 1866년 | 달레 「조선 교회사」 | 프랑스 함대 한강 진입, 서울 앞 정박 (9월 25일 저녁) |
| 1866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1866년 청나라 사신이 왕궁 안 「남쪽을 위한 궁」이라 불리는 곳에서 하룻밤 묵었다. |
| 1866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1866년 3월 병인박해: 3월 8일 베르뇌 주교 등 4명 한강변 참수, 3월 11일 프랑스 신부 2명과 신학생 12명, 3월 30일 다블뤼 참수. |
| 1866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프랑스 군함 두 척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서울 앞에 정박, 여러 날 수심과 높이를 재고 측량함 |
| 1866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조정이 천주교 근절을 결정, 신자를 한강변에서 참수하고 여성과 아이까지 처형 명령 |
| 1873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고종이 성년에 이르러 대원군을 실각시킴. 본문은 왕비가 뒷받침했다고 적음 |
| 1881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척사 유생 이만손(본문 Ni Mansun)이 칠 일간 궁궐 앞에서 상소 농성, 인천 개항과 개화 정책 중단을 요구 |
| 1882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1882년 7월 서울 소요 때 섭정 칭호(일본어 표기 Tai-in kun)가 서양 신문에 자주 오르내렸다. |
| 1882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일본 장교(Horimoto 중위 지휘)가 서울에서 뽑은 병사를 훈련함. 군제 개편의 시작. |
| 1882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미·청 조약 서명 나흘 뒤 서울에서 9살 세자의 혼례(준 대감의 딸). 행렬이 거리를 지남. |
| 1882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7월 23일 왕이 기우제 중 밖에 있을 때 대원군 측 폭도가 왕을 잡으려 함. 왕은 궁성으로 피함. |
| 1882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7월 23일 폭동으로 민비, 세자와 세자빈, 대신들과 일본인 7명이 살해됨. 하루 만에 피가 낭자. |
| 1882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7월 23일 저녁 5시 50분 폭도가 일본 공사관을 덮침. 총·화살·돌을 쏘고 불을 질러, 일본인들이 남은 건물에 불을 지르고 칼과 권총으로 포위를 뚫음. |
| 1882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하나부사가 일본 군 호위를 받고 8월 16일 서울에 다시 들어감. 조선 측은 예의로 맞음. |
| 1882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8월 20일 하나부사가 왕을 알현, 일본 정부의 요구를 전달. |
| 1882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요구에 대한 확답이 없자 하나부사가 8월 25일 서울을 떠나 배로 돌아감. 무력 위협. |
| 1882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대원군의 사과를 받고 하나부사가 8월 30일 서울로 돌아옴. 일본 요구를 전부 수락. |
| 1882년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 뉴욕 트리뷴 10월 2일 전보(9월 13일까지 소식): 조선 정부가 반란자 20일 내 체포·처벌, 손해배상·사과사절 등 일본 요구 조건 서약. |